『완득이』의 김려령 작가가 전하는 뜨거운 감동
2009년 출간되어 뜨거운 화제를 모은 김려령 장편소설 『우아한 거짓말』이 양장본으로 다시 선보인다.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로 출간되어 청소년의 자살과 왕따 문제를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평을 받은 『우아한 거짓말』은 이후 이러한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크게 조명을 받으면서 청소년만이 아니라 부모와 교사,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읽어야 하는 책으로 자리를 넓혀왔다.
촌철살인의 문장과 날카로운 재치가 돋보이는 ‘김려령표’ 문체와 더불어 인간관계와 심리를 깊숙이 파고드는 메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만 떠나야 했습니다.” ―천지
“말로 하는 사과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천지 엄마 오현숙
“지금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털실 뭉치를 찾을 때까지…….” ―언니 만지
『우아한 거짓말』은 평범하게만 보이던 열네 살 소녀 천지가 어느 날 자신이 짠 털실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에서 시작한다. 천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언니 만지는 동생이 남긴 흔적을 좇으며 퍼즐을 맞추어가는데, 차츰 가슴 아픈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와 가까웠던 친구 화연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천지를 이용했고, 천지가 사랑했던 가족들은 이러한 천지의 고민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 그러나 천지가 자신이 미워했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마지막 남긴 편지를 발견하고 만지는 화연을 감싸 안는다.
청소년소설에서 따돌림이나 자살, 친구 문제 등은 흔한 소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물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는 것을 넘어서 인간관계의 역학 자체에 깊숙이 파고든 작품은 드물다. 또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재생의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추천사를 쓴 소설가 정유정은 원고를 받고 “하룻밤 사이 세 번 읽고 세 번 모두 울었다.”며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는 찬사를 전하기도 했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등장인물들의 심리 탐구와 더불어 양파처럼 쉽게 속이 드러나지 않아 팽팽한 긴장감을 전한다. 결국은 풀릴 거라고 믿기에, 갈수록 꼬이는 털실 뭉치를 쫓는 재미가 상당하다. 여기에다 두 가지 시점에서 교차하는 이야기가 독서를 더욱 흥미롭게 한다.
작품은 크게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로 나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산 자들의 이야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지의 주변인들을 둘러싼 사건과 감정의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반면 ‘죽은 자’인 천지는 내레이션 형식으로 그간 겪어온 가슴 아픈 일들과 그 속에서 느낀 고통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말투는 담담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이기에 천지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을 울린다.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는 두 가지 이야기는 천지가 남긴 털실 뭉치를 만지가 발견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고,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 잡아주길 바랐던 천지의 고백으로 막을 내린다.
『우아한 거짓말』 속 이야기는 김려령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주인공 천지와 비슷한 나이였을 무렵, 작가 역시 잔인한 세상을 그만 등지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랬던 그를 구한 것은 진심을 담은 지인의 안부 인사였다. “나를 지치고 쓰러지게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바라봐주는 누군가도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하니까요.”(「작가의 말」 중에서) 작품에서 천지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이들은 더 이상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챙길 것이다. 그것이 천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위하는 척하는 ‘우아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벼랑 끝에 선 사람을 구하는 것 역시 진심 어린 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강렬하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제2의 『완득이』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처음에는 180도 달라진 작품 분위기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한층 깊고 넓어진 김려령의 문학세계에 더욱 빠져들 것이다.
평소와 달리 생일선물을 미리 사달라며 엄마를 조르던 천지는 자신이 짠 털실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천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언니 만지는 천지의 단짝으로 알았던 화연을 만나보지만, 천지에게 생일선물을 받기로 했다는 얘기만 듣고 돌아온다. 한편 천지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내레이션은 초등학교 때 전학 온 이후로 화연이 얼마나 교묘하게 자신을 괴롭혀왔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전한다. 이제 홀로 남은 화연은 천지가 죽은 뒤로 외려 자신이 따돌림 받는 것을 느끼고, 주위를 맴도는 천지의 가족들이 화연을 조여온다.
화연이 천지를 괴롭힌다는 걸 알고 있었던 천지 엄마는 화연 엄마를 찾아가 화연이 천지의 죽음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임을 경고한다. 만지는 천지가 남기고 간 털실 뭉치에서 이제 모두 용서한다는 쪽지를 발견하고 같은 털실을 받은 사람들을 찾는다. 엄마, 만지, 천지의 고통을 방관한 친구 미라, 화연이 털실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고, 궁지에 몰린 화연은 천지와 같은 선택을 하려 하는데…….
기운 생명 끝에 매달린
우박 섞인 비
키 큰 피에로
아픈 영혼
다섯 개의 봉인 실
그렇게 사는 거야
방향 잃은 용서
우아한 거짓말
작가의 말
“잘 지내니?”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나를 붙잡았던 말입니다. 늘 안부를 묻던 이모의 저 말이 없었다면,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내 어린 생을 놓아 버렸을지 모릅니다. 너밖에 없다는, 사랑한다는, 모두 너를 위해서라는 우아한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저 평범한 안부 인사가 준비해 두었던 두꺼운 줄로부터 나를 지켜 준 것입니다. 중학생 때겠지요. 그 아픈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잊으려 할수록 악착같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이니, 잊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 고약한 기억에 슬쩍 웃기도 합니다. 나를 지치고 쓰러지게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바라봐 주는 누군가도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하니까요. 어른이 되어 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 게 아니니까요. 혹시 내 어렸을 적과 같은 아픔을 지금 품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뜨겁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리 생을 내려놓지 말라고, 생명 다할 때까지 살라고. 그리고 진심을 담아 안부를 묻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멀리서도 느껴지는 애정으로 제 글을 다듬어 준 이지영 씨와 창비 출판사 가족들, 늘 다독이고 격려해 주는 선생님들과 동료들,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벌써 바람이 찬 계절입니다. 제 글이 여러분께 따뜻하게 다가가길 바랍니다.
김려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