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 오르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여기, 여섯명의 작가들은 여행을 떠나는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낯선 땅으로 향했다. 누군가는 알래스카의 곰을 보기 위해, 누군가는 운명이 우연처럼 다가와서, 또 누군가는 그저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가방을 꾸렸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곳은 여행 애호가들의 여행지 리스트에 있을 법한 지역들이다. 알래스카, 터키, 몽골, 라오스, 카리브 해, 그리고 폴란드까지. 『누구나, 이방인』은 각종 여행안내서에 소개돼 그 이름만으로 기시감을 주는 여행지에 싫증이 난 이들이나, 보다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것이다. 게다가 여행기를 들려주는 작가들의 면면 또한 매력적이다. 중견 소설가 이혜경을 비롯 이미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천운영, 손홍규 소설가와 젊은 활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세계를 쌓아가고 있는 조해진과 김미월, 간결한 언어 사용으로 정평이 난 신해욱 시인이 여행지에서의 정서를 오롯이 기록했다. 짧게는 몇달, 길게는 일년여의 시간 동안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산 그들은 타지에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하고 새 소설의 영감을 얻어 집필을 시작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누구나, 이방인』을 읽으며 작가들의 사유의 여정에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방인』의 첫 목적지는 알래스카. 소설가 천운영이 그곳의 정취를 전한다. 강렬한 서사와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천운영은 이번 산문에서 재치 있고 유머 넘치는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스타카토처럼 튀어오르는 문장들로 이어지는 여행기의 꽃은 오로라다.
알래스카에 가서 오로라를 보았다.
보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을,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내 몸의 모든 언어를 다 꺼내봐도 오로라의 언저리에도 못 미치리라는 것을, 그것에 가까워지려 하면 할수록 그것에서 더 멀어지리라는 것을, 오로라를 보는 순간 알았다. 나는 혀를 뽑힌 사람처럼 절망적이었다.(9면)
손홍규와 조해진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행기는 좀더 둔중한 울림을 주는데, 그들은 여행을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 깊이 바라보는 기회로 삼는다. 폴란드로 떠난 조해진은 그곳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방인의 삶을 산다. 늘 안개가 낮게 깔린다는 폴란드의 정취는 작가의 존재론적인 고민과 어우러져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내가 소리 없는 낮은 걸음으로 통과한 것은 유럽의 먼 동쪽 나라가 아니라 그저 ‘폴란드’라는 시간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73면)라고 말한다. 여행의 목적지가 어디이든 결국 스스로에게 더 깊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바로 여행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두번째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의 초고를 완성했는데, 이 산문이 소설 창작의 족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손홍규 소설가는 여행기의 시작부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를 작은 방에서 몰아낸 건 벗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벗이란, 작품으로 접한 작가들이다.
소설을 읽으면 시선으로 숨을 쉬게 된다. 나는 그걸 영혼의 복식호흡이라고 불렀다. 눈을 감으면 망막에 맺혔던 문장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 거칠고 각다분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능숙하게 매만지는 소설가를 생각하면 어쩐지 그이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 사랑스러운 소설을 만나면 먼 곳에서 방문한 벗을 대하듯 반가운 심정이었고 작은 방에 홀로 앉아 활자들을 시선으로 쓰다듬이며 한 문장도 허투루 읽지 않는 것이야말로 벗을 위해 내가 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믿었다.(122면)
머나먼 이국의 벗을 어렵게 만나고 돌아온 그는 이렇게 다짐하듯 읊조린다. “터키에서 돌아온 이유는 나도 누군가의 벗이 되고 싶어서였다.”(153면) 누군가의 벗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외로운 고투를 할 그에게 터키에서 보낸 얼마간은 분명 오랜 시간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듯하다.
독자들을 라오스로 이끄는 건 신해욱 시인이다. 시인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언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차오르는 두려움은 바로 소통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언어를 잃어야만 좀더 평화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신해욱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함께 낯선 말을 쓰는 거라면, 낯선 말은 종종 낯선 대로 좋다. 몇개의 단어와 보디랭귀지를 섞어 최선을 다해 뜻을 전하고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맥락을 생각한다. 길거나 짧은 여정에 대해,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가족에 대해, 헤어진 애인에 대해, 젓가락을 잡는 방법에 대해. (210면)
미국과 꾸바, 도미니까공화국까지를 아우르는 이혜경 소설가의 여행기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혼자 있을 때, 나는 한결 자유롭고 편했다. 야간버스를 타고 밤길을 달릴 때면, 내가 세상에서 이대로 없어져도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는 적막한 마음이 들었다. 파초잎 위의 물방울처럼 팽팽한 표면장력, 존재가 긴장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175면)
바로 이런 소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을 갈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언어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하는 작가들은 여행지에서 언어의 불구성을 느끼고, 또 그 경험으로부터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누구나, 이방인』을 읽는 또다른 즐거움은 바로 이러한 현장을 목격하는 데서 온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김미월의 산문에서는 여행기의 아기자기한 매력이 그대로 발산된다. 작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몽골에 도착한 그녀와 한국 연예인을 줄줄 꿰고 있는 여행 안내자와의 첫 만남은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
아, 이런. 개구멍을 모르다니. 역시 회화의 구멍은 어휘에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개구멍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세상에 오래된 담장 치고 개구멍이 없는 것은 드물며 우리도 당장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84면)
유쾌한 이방인 김미월이 들려주는 게르와 오워, 고비사막 등의 이야기는 몽골을 마음속 여행지로 꼽아둔 독자들의 행동을 이끌어내기 부족함이 없다.
세계 곳곳으로 떠난 작가들이 품고 돌아온 빛나는 추억은 『누구나, 이방인』, 이 특별한 여행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다. 갈피갈피마다 꽂혀 있는 여행지의 사진은 독자를 한달음에 오로라 앞으로, 메콩 강 위로, 고비사막 한복판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오로라를 보았다 천운영(알래스카)
‘폴란드’라는 시간을 통과하였다 조해진(폴란드)
몽골에서 부친 엽서 김미월(몽골)
벤 야자름 손홍규(터키)
카리브 해에서 만난 미국 이혜경(카리브 해)
루앙프라방행 슬로우 보트 신해욱(라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