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07

투구꽃

최두석  시집
출간일: 2009.10.20.
정가: 8,000원
분야: 문학,
인간사 너머의 순결한 원초성, 그 자기성찰의 근원

 

 

 

 

자연을 바라보며 인간의 삶을 이야기해온 최두석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투구꽃』이 출간되었다. 6년 만에 펴내는 신작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고요하고 깊어진 시어로 자연과 인간을 노래한다. 시세계에 드러나는 생태계의 진면목은 진솔한 어조와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바, 독자에게 때로는 따뜻한 미소를, 때로는 호된 질책을 던져준다.

 

이번 시집에서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연에서 시의 소재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길이다. 그 대상은 장미 사스레피나무 투구꽃 물봉선 등의 식물에서부터 청띠제비나비 강치 후투티 황조롱이 직박구리 부비새 등의 동물은 물론 남대천 백록담 들녘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시인은 자연도감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대상들을 정감어린 토박이말로 생생하게 그린다. 그러나 자연의 대상을 역사적 상상력을 매개하는 우의적 상관물로 상정했던 초기시편과 달리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한[然] 생명 본연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보여준다.

 

 

 

 

 

멧돼지들이 알뿌리를 파먹느라/땅을 헤집어놓곤 한다는/지리산 돼지평전에 올라/바람에 흔들리는 원추리꽃 보네// (…) // 근심과 우울을 모르는 멧돼지들/씩씩거리며 골짜기를 누비다가/잠들면 무슨 꿈 꿀까 생각하네.(「돼지평전 원추리」부분)

 

 

 

 

 

자연의 사물들을 ‘역사적 상상력’이 아닌 ‘생태적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변화된 모습에 걸맞게,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외부 풍경의 일차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맺고 있는 연쇄고리에 대한 천착으로 확장된다.

 

 

 

 

 

술래 술래야/굼실굼실 무논의/벼포기 사이를 옮겨다니던/우렁이를 찾아봐라/우렁이를 맛있게 찍어먹고/고개 들어 울던/키다리 황새를 찾아봐라/황새 그림자에 놀라/이리 뛰고 저리 뛰던/개구리를 찾아봐라/ (…) /발등이 붓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돌아다니며 찾아봐라/다 어디로 가서 꼭꼭 숨었지?(「고향 들녘에서」부분)

 

 

 

 

 

자연 속에서 여러 생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처럼 존재하던 공존의 고리는 이제 아무리 찾아도 볼 수 없게 “다 어디로 가서 꼭꼭 숨”어버렸다.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조화로운 질서를 무너뜨린 폭력적인 외인이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평론가 유성호가 해설에서 언급하듯 최두석 시인은 일관되게 ‘문명비판’과 ‘자연 긍정’의 태도를 지향한다. “사람들은 약수라 하지만/실상 나무에게는 피”(「백운산 고로쇠나무」)라거나 “사람들이 잡초라 하는/바랭이나 강아지풀의 씨앗이/부비새에게는 귀한 양식”(「부비새 운다」)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은 뿌리깊은 인간중심적 사고야말로 자연파괴의 근본적 원인임을 직설적으로 꼬집는다.

 

물론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선악으로 대비하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몰되진 않는다. 세상의 이치란 그렇게 확연하게 분절되거나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시인은 통찰하고 있다.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애증이 엇갈릴 때/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머리가 아파올 때/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진보라의 진수라 할/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투구꽃」전문)

 

 

 

 

 

플라톤이 문자를 ‘약’인 동시에 ‘독’의 속성을 가진 존재로 비유해 명명한 ‘파르마콘(pharmakon)’을 떠올리게 하는 투구꽃의 양면성, 치유력과 독성의 공존이야말로 인간 너머, 문명 너머에 있는 모든 원초적인 것들의 존재형식임을 보여준다. 이를 바탕으로 시인은 약과 독의 변증법적 합일이라 할 수 있을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의 삶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현호색과 얼레지는/서로 마주 보고 필 때 가장 선연하다/ (…) //일종의 꽃싸움/서로 아름다워지려는 싸움이다/자신의 피를 맑게 하고/세상을 더욱 다채롭고 생동하게 하는 싸움이다//친구여, 우리 꽃싸움 하자/위로와 격려로 적당히 다독이거나 추어주지 말고/혼신의 힘으로 꽃대궁 밀어올려/제대로 한번 겨뤄보자.(「꽃싸움」부분)

 

 

폭포가 떨어지는/암벽에서 솟아/쏘는 맛이 각별한 샘물/심마니들은 왜/불바라기 물로 행운을 빌었을까//깊은 산중에 와/맨 처음 불바라기라 부른 이는/가슴속의 불/어떻게 다스렸을까 생각하며/산길을 걷고 걷고 걷는다.(「불바라기 가는 길」부분)

 

 

 

 

 

이러한 삶의 자세는 ‘생각한다’는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가령 “거위벌레도 엄연히/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요람과 무덤」)”거나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투구꽃」), “백마강 탁류를 건너간 이들이 흘린/눈물 섞인 땀과 피를 생각한다”(「고란사 고란샘」)면서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성찰한다. 이러한 자기성찰이야말로 이 시집에서 가장 순결하게 빛을 발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이, 최두석의 시가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 자기 귀환과 정립의 자세를 보여주는 뜻깊은 사례라는 유성호의 언급은 그래서 의미있게 읽힌다. 묵묵히 자신의 시세계를 걸어가면서도 점차 새로운 경지를 넓혀가는 최두석의 시는, 그가 견지해온 리얼리즘 시의 감동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느끼게 해줄 것이다.

 

 

 

 

 

강과 뼝대가 잘 어우러진/동강 가수리 콘크리트 포장도로/먼저 까투리가 주위를 살피며 도로를 건너간다/다음 장끼가 등장하여 어험스럽게 걷는데/꺼병이 아홉 마리가 연이어 나타나/달음질로 잽싸게 도로를 가로지른다/어미 까투리는 풀숲에 숨어 새끼들을 부르고/아비 장끼는 마지막 꺼병이가 풀숲에 드는 것을 보고 뒤따라 자취를 감춘다/새끼를 돌보는 까투리의 조심스러운 몸짓과/장끼의 의젓한 태도가/눈시울이 젖도록 정겹다//꿩 가족의 삶터에/허락도 없이 들어온 나는/잠시 운전대를 놓고 그들의 안녕과 행운을 빈다.(「꿩 가족」전문)

목차

제1부

겨울 장미

사스레피나무

요람과 무덤

독도와 강치

백운산 고로쇠나무

고향 들녘에서

명이

지장보살을 먹다

후투티

괭이갈매기

황조롱이

부비새 운다

팥배나무와 직박구리

꿩 가족

두루미

 

제2부

족도리풀

홀아비바람꽃

복수초

뻐꾹나리

물봉선과 호박벌

돼지평전 원추리

투구꽃

남대천을 거니노라면

박달나무

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

산벚나무가 왕벚나무에게

가시연꽃

황새여울

강 건너 산철쭉

꽃싸움

청띠제비나비

 

제3부

무등산 해맞이

참성단 소사나무

면앙정 참나무

철원노동당사 돌나물

이팝나무 꽃그늘

조팝꽃

며느리밥풀꽃

생강나무

천남성

김굉필 은행나무

선운산 꽃무릇

매화차

옥룡사터 동백숲에서

정암사 주목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화엄사 매화나무

연화대좌 앞에서

 

제4부

백록담

고란사 고란샘

느티나무

그 놋숟가락

바람과 물

게와 개

탄금대에서

재인폭포

현등사 곤줄박이

사막 도마뱀

불바라기 가는 길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의심 많은 새는 알을 품지 못한다

백두에 올라

고니

 

해설│유성호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