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01

야생사과

나희덕  시집
출간일: 2009.05.12.
정가: 11,000원
분야: 문학,
도서상태: 절판
생성의 시간을 흐르는 환한 물방울 같은 시

 

 

창비시선 300번 이후 새로운 판형과 한결 세련된 디자인으로 처음 펴내는 창비시선 301번,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가 출간되었다. 섬세한 눈길로 아련한 존재들을 어루만지며 삶의 의미를 길어온 시인은 『사라진 손바닥』(2004) 이후 오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한층 원숙해진 솜씨로 단정한 서정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스스로를 갱신하며 다른 존재, 새로운 생성의 시간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순순히, 그러나 견결히 자신의 영역을 깊고 넓게 만들어가는 시편들이 독자의 마음에 오랜 자국을 남긴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 달고 시고 쓰디 쓴 야생사과를 //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야생사과」 부분

 

 

 

표제작 「야생사과」에서부터 감지되는 것은 어떤 낯선 기운이다. 그는 오래 가만히 바라보는 시인, 그 바라보는 대상과의 거리에서 오는 긴장으로부터 생에 대한 단단한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시인이었다. 한동안 그의 시는 생명과 죽음, 또는 마른 것과 젖은 것 사이의 그 긴장과 균형으로부터 애달픔과 연민의 감성을 자아내왔다. 그러면서 그는 상처와 고통마저 따뜻하게 만들어 감싸안는 시인이었다. 그 눈 밝은 감각이 이번 시집에서는 바깥을, 혹은 안을 향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낯섦을 찬찬히 바라보는 대신 대상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낯선 절벽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선뜻 베어물자,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낯설게 보인다. 바라보는 행위가 나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지 않고 어딘가 다른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이 시집을 끌고 가는 것은 그 낯섦이기도 하다.

 

 

 

 

 

물이 빠져나간 거대한 연못, / 언젠가 눈에 박힌 그 풍경 나가지 않네 // 장화 신은 발들이 / 연못 바닥을 저벅저벅 걸어다니네 / 울컥 고이는 발자국을 / 검고 끈적한 진흙이 삼켜버리네 // (…) // 장갑 낀 손들이 / 바닥에 흩어진 잔해를 그러모으네 / 이토록 태울 게 많았던가 / 번제를 올리듯 어떤 손이 불을 붙이네 // 타오르면서 타오르지 않는 불의 중심, / 명치끝이 점점 뜨거워지네 ―「마른 연못」 부분

 

 

 

해설을 쓴 평론가 조강석이 읽어내듯, 시인은 이전 시집에서 연꽃이 사라진 빈 연못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추슬러 재생의 시간을 도모하였던 데서(『사라진 손바닥』 표제작) 이제는 그 마른 연못을 낯선 누군가가 파헤치고 불붙이는 것에 선선히 몸을 맡기며 외려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잔해를 발견하고 태우고 비워내는 계기로 삼는다. 그것을 일컬어 번제(燔祭)라 할 것이니,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결연한 아름다움으로 피워올리는 휘황한 장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태우고 비우는 것은 다시 연못에 물이 채워지게 하기 위한 것, “쾌활했던 물줄기 잦아들고 / 자기도 모르는 고요에 갇혀 있던 물, / 숨 막히는 그 고요야말로 소용돌이였음을 / 너무 늦게야 알게 된 물 / (…) 검은 눈동자처럼 타들어가던 물”(「물의 출구」)과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한없이 안으로 잦아드는 일이 곧 스스로를 흐르게 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를 좀 지워주렴. //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 안개를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 (…) // ―나를 좀 채워주렴. //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심장 속의 두 방」 부분

 

 

 

이번 시집에서 ‘방’에 관한 시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지금껏 견고하게 쌓아온 내면의 방이 자꾸만 불편하고(「누가 내 이름을」), 그곳에서 자꾸만 자신을 지우고 싶다(「존 말코비치 되기」). 그러자면 위의 시처럼 나를 ‘지우고’ 동시에 ‘채워야’ 하는 것, 심장 속의 두 방이 한편으로 비워지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채워져야만 심장이 온몸에 피를 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빈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 “빈혈의 시간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수국이 피고” “사과가 익”(「물방울들」)는 변모와 생성이 가능한 것은 이 지움과 채움의 메커니즘 덕분이다. 안과 밖의 경계에서 시인을 규율하던 긴장과 균형의 감각은 이렇게 시인의 내부로 들어와 그를 다른 시간, 다른 존재로 흘러가게 만든다.

 

 

 

 

 

음악에 몸을 맡기자 /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 (…) /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분홍신을 신고」 부분

 

 

 

‘분홍신을 신고’ 음악에 몸을 맡긴 시인은 이제 시간을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 노랫소리가, 시종 뒤엉킨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결연하면서도 편안하다. 시집 전체의 목소리가 그렇다. 그 움직임이 안으로 잦아드는 동시에 밖으로 흘러나오는 운동을 분간없이 아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기원에 대한 갈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시인의 말’)는 사실을 그는 자각하고 있다. 시인은 지금 기원을 향해, ‘첫 물줄기를 향해’ 경계를 넘어서면서 ‘나를 흘려보내는’ 중이다. 스스로를 한없이 풀어내면서도 결코 긴장과 균형의 감각을 잃지 않는 점이, 시와 삶을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시인답다.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 하지만 “이제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 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다른 나를.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은 ‘또다른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기다림 역시 시인이 이미 들어와 있는 생성의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환한 순간의 시를 기다리는 우리가 시인만큼이나 설레는 것도, 그 기다림이 이미 성취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원숙해진다는 것이 한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넓고 깊게 확장해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그의 시를 기다려온 이들에게, 『야생사과』는 봄그늘의 소식처럼 환하고 설레는 기별과 같은 시집이 될 것이다.

목차

1부

새는 날아가고

빗방울에 대하여

야생사과

숲에 관한 기억

쇠라의 점묘화

말의 꽃

꽃바구니

불견(不見)과 발견(發見) 사이

모래알 유희

한 아기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갠지즈 강가에서

숨비소리

결정적 순간

존 말코비치 되기

분홍신을 신고

 

2부

육각(六角)의 방

물방울들

벽과 바닥

대화

원정(園丁)의 말

마른 연못

심장 속의 두 방

그의 사진

육교 위의 허공

낯선 편지

뱅크셔나무처럼

옥수수밭이 있던 자리

누가 내 이름을

우리는 낙엽처럼

안개

 

3부

돼지머리들처럼

구경꾼들이란

구경꾼이 되기 위하여

바람과 바람막이

삼킬 수 없는 것들

내부를 비추는 거울

정신적인 귀

손바닥이 울리는 것은

일요일 오후

공포라는 화석

팔이 된 눈동자

도로 위의 성만찬

빈자리

거대한 분필

그는 누구인가

 

4부

와온(臥溫)에서

욕탕 속의 나무들

포만감과 허기

어떤 그물

맑은 날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물소리를 듣다

기억한다, 그러나

노루

절, 뚝, 절, 뚝,

캄캄한 돌

한 손에 무화과를 들고

밤 강물이여

물의 출구(出口)

기적소리

반딧불이를 보았으니까

두고 온 집

 

해설│조강석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