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열다섯 살의 빠리 소녀 스리즈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얘기를 엿듣는 걸 좋아한다. ‘버찌’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소녀는 이혼한 아빠와 엄마의 집을 오가느라 지하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은 남들 얘길 듣느라 내리는 역을 놓치는 때도 있다. 그리고 노숙자들이 구걸하며 늘어놓는 말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지만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 스리즈는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6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 스리즈는 지하철에서 푸른 눈에 체격이 건장한 남자와 마주친다. 그는 한 손에 구걸용 깡통을 들고 어깨엔 커다란 가방을 메고서 큰 소리로 떠들고 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가 가짜라는 걸 느낀 스리즈는 그 남자가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직감한다. 그날 저녁, 붉은 원피스를 입고 친구 집에 놀러 가던 스리즈는 지하철에서 그를 또다시 만나게 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평범한 소녀가 맞닥뜨린 폭력의 맨 얼굴
얼마 전 서울에서는 30대 무직자가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6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생활고를 비관한 어느 30대 여인은 두 자식을 데리고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 양극화와 이에 따르는 인간 소외는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붉은 지하철』은 바로 이러한 일상 속 빈곤과 폭력의 관계에 주목한 소설이다.
주인공 스리즈는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점만 빼면 보통 중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다. 숙제와 시험 준비에 바쁘고, 가끔은 친구 집에서 밤새워 놀기도 하는. 그러나 스리즈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끔찍한 폭력과 대면해야 했다.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흔을 입은 소녀는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스리즈는 언제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관찰해왔기에 푸른 눈의 사내가 몰고 올 비극을 누구보다 빨리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가졌다 해도 폭력 앞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쓰라리다. 이 소설은 청소년이 개인이나 가족에서 사회로 시선을 넓혔을 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끔찍한 기억을 다스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글
작품 속에서 스리즈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써 내려간다. 고통과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는 혼란과 죄의식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붉은 지하철』의 문체와 형식은 독특하다. 시점이 계속 바뀌고, 내면의 독백과 실제 대화가 뒤섞이고, 문장들이 마침표 대신 쉼표로 연결되는가 하면 아예 구두점이 없는 대목도 있다. 이 변화무쌍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는, 지하철 안이라는 좁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과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주인공 스리즈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독자 역시 고통을 느끼며, 푸른 눈이 빨리 지하철에서 내리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붉은 지하철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