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갈대 등본」)던 첫 시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경험’의 차원에 서 있던 ‘바람’은 이제 좀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나는 천년을 묵었다 [……]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로 경험적 차원을 ‘존재’로 확장하며 심화시켰다. 시인 박형준은 이를 두고, “우주적인 적막의 장엄 같은 바람”은 일상의 현실 곁에 숨어 있는 또다른 현실을 번역해주는 언어이고, 이를 옮겨쓰는 시인은 급기야 ‘바람 교도(敎徒)’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상의 현실을 옮기는 데에 등장하는 구두수선공, 이주 노동자, 경비원 등은 삶의 실감으로 존재하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시인은 구체적인 생활 속 가난의 현실이 아니라 근원적 차원의 ‘허기’를 그려, “허기의 크기만큼” 살아가는 이들(「허봉수 서울 표류기」)의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풍경(「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을 포착한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이를 두고, “지속적으로 몸을 바꾸며 나타나는 ‘허기’는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미완의 생의 형식”에 대한 은유로 풀이하면서, 시인의 자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언어의 허기’를 설명한다.
첫 시집보다 의미론적인 불투명성을 더한 이번 시편들은 난해성의 표상이 아니라 투명한 표현과 선명한 기억이 자칫 불러올 수 있는 불완전함에 대한 시인의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굴에 잠긴 얼굴과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들/얼굴의 바닥인 마음과 얼굴의 바깥인 기억”(「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의 균형은 투명한 세계보다는 다채로운 국면의 불투명한 의미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원형적인 차원에 이른다.
자연현상을 지나, 기억과 경험의 차원에 있던 ‘바람’을 지나 그 발원에 집중하고 그곳에 가닿으려는 노력이 넘쳐나는 이번 시집은 언젠가는 ‘바람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아도 좋을 좀더 궁극적인 질서를 향한 시인의 욕망을 고스란히 녹여낸다. “거울 속에서도 얼굴을 찾지 못”한 바람에게서 오롯이 자유로워진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에 더 많은 기대와 주목을 기울일 만하다.
제1부
새들의 페루
가을비
허봉수 서울 표류기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
어둠에 들키다
별
구름의 장례식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유쾌한 노선
형틀 숭배
돌 던지는 生
우우우우
붉새
틈
중심을 쏘다
제2부
새들이 지나갔는지 마당이 어지러웠다
흰빛의 감옥
젖은 옷을 입고 다녔다
바람은 개를 기르지 않는다
바람의 무덤
섬진강에 말을 묻다
대천항
혀의 해안
겨울 부석사
붉은 솥
버드나무 어장
명태 아가리
제3부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칼이 있는 잔치
스타킹
권태로운 육체
무너지는 서쪽
야생동물보호구역
마포, 해궁막회
먼지가 반짝이네
나비
경비원 정씨
봄산
해의 장지
제4부
投石
나비는 나비에게로 가
대나무의 출가
무지개를 보았다
처연한 저녁
그 봄, 아무 일 없었던 듯
밤나무 위에서 잠을 자다
저녁에
날아오르나, 새
햇살의 내장이 비치다
볕은 눈 녹은 담장 아래 눈 녹인 볕
강화도, 석양
말의 퇴적층
해설│유성호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