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이 순박하고 아름다운 시를 만난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첫시집 『거미』(창작과비평사 2002)를 통해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시인으로 주목받아온 박성우(朴城佑)의 두번째 시집 『가뜬한 잠』이 간행되었다. 천연덕스럽게 슬픔을 노래하면서 삶의 그늘을 읽는 섬세한 시인의 눈은 더욱 깊고 그윽해졌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55편의 시들은 물 흐르듯 발성과 호흡이 매끄럽다.
최근 시인들의 외래어·외국어·신조어가 난무하는 암호문 같은 복잡한 내면 스케치와 달리, 거위 모양의 오카리나를 들고 검푸른 저녁 강가에서 부르는 시인의 나직한 노래 속에서, 독자들은 맛깔스러운 우리말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음성학적인 동그라미(울림)들과 만나고, 더불어 은은히 번져가는 시적 여운 가득한 따뜻한 풍경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시인이 그려낸 세계는 너무 자연스러워 무심결에 지나쳐버리고 말 것처럼 낯익은 풍경이지만 그 속에는 일렁이는 그림자를 던지는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얼굴들이 영롱하게 맺혀 있다. 물결을 따라 쉼없이 흘러서 어떻게 붙잡을 수 없는 형상들, 그러나 그 형상 하나하나에 맥박을 돋게 하는 손길은 사뭇 전통적이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다. 시인은 급박함이나 격렬함을 안으로 삼켜 되새김질하되 그것을 낯선 장면으로 전환시켜 노래하는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별빛 일렁이는 물결소리/달빛 밀고 가는 바람소리/외딴집 할머니 재운 불빛이/촉수를 낮춰 물가로 내려오는 소리/발 담근 산그림자/가만가만 뒤척이는 저녁 강가에 앉아/끝끝내 그리운 그대 얼굴/발끝으로 찰방찰방 일렁이며/작은 거위가 들려주는/쓸쓸한 노래 듣고 싶어/노래하는 작은 거위,/오카리나를 품고 저녁 강가로 갔네/그대 오가려나 그대 오가려나/그대 기다리던 기나긴 밤들도/나와 함께 검푸른 저녁 강가로 갔네 ―「오카리나」 부분
박성우가 펼쳐 보이는 시세계에서 한데 어우러진 슬픔과 웃음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시인은 슬픔과 웃음이 따로 분리된 정서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의 노래는 맑고 깨끗한가 하면, 그 투명함 속에서 서글픔과 비애가 한꺼번에 얼비친다. 딱히 하나로 규정해버릴 수 없는 미묘한 그 형상을 잡아내는 시인의 눈에서 낡은 듯해 보이던 세계는 새로운 옷을 입고 다가온다.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숱하게 노래됐을 법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시골 할머니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낸 「봄날은 간다」에는 마을을 찾아온 풍각쟁이들과 그들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가 나온다.
아코디언 소리에 하나둘 느티나무 아래 모여들어 '봄날을 간다'를 열창하는 할머니. 여기서 압권은 할머니가 노랫말을 놓쳐 볼이 발그레해져 열아홉살 처녀같이 수줍어하는 대목이다. "꿀을 먹은 할머니는/연분홍 치마를 놓치고 놓쳐/아코디언 반주만 봄날을 갈" 때 노래 부르던 "허명순 할머니는 열아홉 허명순이로" 가면서 복사꽃처럼 화사했던 '열아홉 봄날'로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풍경은 빙긋이 웃음을 짓게 하면서, 한편으로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해학과 비애가 한데 어우러진 골계(滑稽)의 아름다움, 거기엔 브라스(brass)와 북이 어수선하고 요란하게 울리는 집시들의 음악은 아닐지라도 유쾌하면서도 비애 서린 묘한 유랑의 정서까지 스며 있어 단순하지 않은 생의 기쁨과 서글픔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골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들은 시집 곳곳에서 눈에 띈다. 땡볕이 내리쬐는 고추밭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던 나이 어린 막내형수가 빗방울에 반가워,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앗싸, 비온다"를 외친 뒤 웃음으로 마음이 밝아져 일을 접고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추석 풍경을 그린 「고추」 같은 작품이나, 결혼식날 '하객을 맞이해야 할 아버지가 하객으로도 오지 않은' 말 못할 애틋함을 나타내며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절묘한 조화를 이끌어내는 「신혼 첫날,」 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박성우의 시에는 은근히 웃음을 자아내는 유쾌한 시편들이 많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웃음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것은 없다.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버릇」이나 「삼학년」 같은 시들에도 순진무구함 속의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버릇」의 시적 화자가 어린시절 땅에 떨어진 눈깔사탕을 남몰래 닦아먹던 버릇대로 맞선자리의 우아한 숙녀 앞에서 흘린 커피를 무의식중에 혓바닥을 내밀어 닦았던 경험의 난감함이라든가, 난생처음 뺨따귀를 얻어맞은 일화(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어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을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붇고, 사카린이랑 설탕도 몽땅 털어넣어,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던)를 그려낸 「삼학년」 같은 시의 엉뚱함이 그렇다. 이 모습들은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그 행위들이 그의 시처럼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는 순박해서 욕을 얻어먹는 촌뜨기의 건강성이며, 영악하고 세련된 현대인들의 욕망을 뒤집는 모더니티 이전의 유구한 건강성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순수한 슬픔은 그 자체가 지상의 오탁(汚濁)을 정화하는 고귀한 감정인데, 문학이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슬픔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불운한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슬픔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며 박성우 시에는 이러한 강점이 숨어 있음 읽어낸다(염무웅 해설 「슬픔은 영혼을 정화한다」). 정갈한 노래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부르는 노래. 운과 율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금 운율을 살려내고 있는 박성우의 시들에는 순수함과 순정함이 깃들어 있다.
박성우는 최근 수다스럽고 자기 과시적이고 파괴적인 산문시들의 현란한 이미지들 한켠에서 산뜻한 서정시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깊은 행복감을 주는 것인지 새삼 일깨운다.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옹이처럼 눈을 뜨고 다시 검푸른 저녁 강에서 헤엄치기 위해 단단히 결과 결 사이에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과거는 미래지향적으로 사랑 앞에서 헤엄쳐올 것이다. 그것은 곡식 까부는 소리를 들으며 무섭게 조용한 잠을, 아주 가뜬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생일 밥숟갈을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처럼 차게 다녀가는 어떤 것이다(「가뜬한 잠」). 따르꼬프스끼의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노스탤지어에는 일종의 귀기(鬼氣)가 스미어 있게 마련이다. 두려우면서 낯선 감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고 그리움이 그렇듯이.
제1부
삼학년
가뜬한 잠
소금벌레
물의 베개
도원경(桃源境)
능구렝이
봄날은 간다
보라, 감자꽃
오카리나
장마
초록바위
김일무선
동행
장산도
가시내
경칩
피싱따이위에
모내기
장
담그기
싸전다리
제2부
입춘 윷판
빙판길
사랑
목도리
강에게 미안하다
햇볕이 날리다
동그라미
되새
새모리댁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지평선에 닿다
소금창고
건망증
고양이
오두막 이야기
해바라기
자귀꽃
식은밥단술
제3부
버릇
장작불
첫눈
신혼 첫날,
코뚜레
나무물고기
소한(小寒)
화암사에 오르다
고추
옥정분교
고요한 밤
감자 캐기
장독
한로(寒露)
냉이
겨울, 선운사
동백꽃
봄, 가지를 꺾다
해설│염무웅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