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이혜경  소설집
출간일: 2006.05.30.
정가: 12,000원
분야: 문학, 소설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소설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혜경은 등단 25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늘진 삶의 구석구석을 애정어린 시선과 정교한 필치로 형상화해온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더디지만 탄탄하고 뚜렷한 행보를 걸어왔다. 장편 『길 위의 집』과 소설집 『그 집 앞』 『꽃그늘 아래』로 오늘의 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그리고 독일의 리베라투르 상(LiBeraturpreis) 등의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이혜경의 세번째 소설집 『틈새』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긴 여운과 잔잔한 문학적 감동을 던지는 이혜경 소설미학이 농익으며 변주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현실적 지평은 더욱 넓어지고 오늘을 사는 인간의 더욱 깊어진 아픔을 섬세하게 천착하는 작가의 감성을 확인케 하는 다양한 소재와 등장인물이 눈에 띈다. 이주노동자, 전화선으로만 삶을 사는 네트워커, 소도시 가전제품 기사, 여행가이드, 대형마트의 보안요원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마다 욕망으로 벌어진 현대인의 삶의 틈새에 밀착해 감싸고 보듬으려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틈새』에는 2006년 제13회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피아간(彼我間)」을 비롯한 8편의 단편과 미발표 신작 단편 「섬」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 「틈새」에서는 가전제품 애프터써비스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영석은 육사를 나와 승승장구하다가 큰빚을 지고 소도시인 고향으로 돌아와 우주슈퍼를 차린다. 살림을 하던 아내 재희가 어느날 갑자기 단란주점을 차리고, 급기야 이혼 선언을 한다. 아내의 이혼 요구로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성공가도를 달리던 영석이 기수련을 표방한 사이비종교단체에 재산을 털린 사연을 듣고,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자신의 삶이 맞이한 틈새를 돌아본다.

 

 

 

올해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피아간」은 주인공 경은이 가족들에게 불임사실을 숨긴 채 거짓 임신을 꾸미고 지내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유언장을 작성하라는 새어머니에 어이없어 하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경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중 입양할 아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가족간의 관계와 소통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등단 이래 이혜경이 꾸준하게 매달려온 소재에,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임 문제나 재혼 문제 등 관심사의 폭을 넓혀 한층 문제적으로 다루었다. 가족간의 갈등을 다룬 또다른 작품 「섬」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작은아버지에게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자매가 등장한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포목점을 운영하던 작은아버지는 언니를 점원으로 부리고, ‘나’에게는 대학등록금조차 인색하게 구는 인물이었다. 작은집 식구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울렁거린다는 주인공 내적 증상은 탈것만 타며 어김없이 찾아오는 언니의 ‘멀미’에 다름아니다. 또한 작가는 섬처럼 부유하는 주인공의 삶에 찾아오는 멀미를, 일본이나 대만 같은 섬나라가 겪는 지진에 비유하기도 했다.

 

 

 

「크레바스」에서는 대형마트의 보안요원이 주인공으로, ‘그’는 어린시절 겁이 많아 밤에 화장실을 갈 때면 다섯 살 아래 동생을 끌고 갈 정도였다.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유괴사건으로 잠자던 동생을 잃은 ‘그’는 꿈결인 듯 그 장면을 떠올리고,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겁이 많아 오히려 위험 요소를 찾아내는 데 두각을 보여 마트에 취직하고, CCTV를 지키지만 사시(斜視)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마트의 CCTV에서 어릴 적 유괴된 동생과 흡사한 외양의 여인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유난히도 담력이 약한 성정, 유괴당한 동생, 사시 증상 등 결핍의 징후를 다분하게 안고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CCTV 속에서만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타자화시키고 소외시키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문밖에서」는 절친한 친구인 L의 생일 파티에 모인 친구들과 어느새 강요가 되고, 부담이 되어버린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를 털어놓는 L의 이야기이다. 공동체와 ‘함께’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폭력이 무의식중에 개인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안정감 있게 형상화했다. 문학평론가 김영찬은 이 작품에 대해 “차이를 배제하고 동일화하는 집단주의에 대한 성찰적 거부이며 개인에 대한 조용하지만 강력한 옹호”라고 평한다.

 

 

 

이주노동자의 삶에 그린 단편 「물 한모금」에서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인 아밀, 일본 여자의 기사로 일하다 도둑질을 혐의로 거리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아밀의 동생 라흐맛, 그리고 아밀이 한국에서 만난 샤프가 등장한다. 동생 라흐맛처럼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기는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경계(국경)에 서서 삶도 사랑도 허락받지 못한 이주노동자 신세는 처량하기 짝이 없다. 아밀이, 인생은 그저 소가 ‘물 한모금’ 마시는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부유하는 자신의 삶과 잡혀간 샤프의 삶을 돌아보는 장면은 이주노동자의 고단한 삶과 현실을 애틋하게 보여준다.

 

 

 

그밖에 네트워크로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현실의 공간에서는 인간적인 소통이 부재하거나 어긋나기만 하는 현대의 일상을 그린 단편 「그림자」,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행사되는 폭력과, 아파트 공동체라는 이름의 폭력에 주목하는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 어른들 말을 듣지 않으면 늑대가 잡아간다는 경고를 믿었던 어린 시절의 소소한 추억을 엮은 소품 「늑대가 나타났다」 등이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황도경의 해설처럼 이혜경의 이번 소설집은 ‘틈새’의 또다른 이름인 일상의 경계와 ‘금’, 거기서 비롯되는 폭력성과 소외성에 천착한다. ‘우리’라는 울타리와 경계에 속하지 않은 ‘타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타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섬세하게 읽어내며 보듬는 이혜경의 시선은 일방의 편을 드는 대신 결국 우리는 모두 ‘섬’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쓸쓸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환기시킨다.

목차

물 한모금

그림자

문밖에서

틈새

피아간(彼我間)

크레바스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

늑대가 나타났다

 

해설_황도경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