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역사의 질곡을 헤쳐나가던 1980, 90년대에 시인은 모나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내세우지 않고 ‘세계’에 대한 ‘나’의 자세에 천착하는 내성의 절조를 유지해왔다. 이번 시집 『세상에 새로 온 꽃』에서 시인은 그런 내성의 목소리를 끌어올려, 돌아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문명의 내면을 진단하는 시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의 「집」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집에서 ‘돌아갈 곳’은 ‘집’이라는 은유로 비유되고 있다. 시인에게 ‘집’은 가족과 함께 편히 몸을 누일 휴식처로서의 ‘집’이 아니라, 정신이 참 자유를 얻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시인이 보기에 현대의 자아들은 모두 노숙자이다. 그들은 “전제적인 이 문명의 질주” 속에서 집을 잃고 “스스로도 전멸을 입에 올리는” 자들일 뿐이다. 시인은 우리가 가야 할 집은 인디오의 “형형색색 제각각인 씨감자” 속에 있다고 말한다(「인디오의 감자」). 아무리 큰 재앙이 닥쳐와도 형형색색의 종자로 인디오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는 이 씨감자는 “문명의 질주”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정신적 풍요와 다양한 유연성을 일깨운다.
「공주 시장」「아버지」역시 ‘집’을 매개로 독자에게 큰 울림을 던져주는 시편들이다. 「아버지」에서 뇌졸중으로 중환자실 침대에 묶여 있던 화자의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 집은 “고향도 아니”고 “창신동 골목길 셋방”일 뿐인데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명(병원)에서의 죽음을 거부하는 아버지의 몸부림을 통해 어느 사이에 이미 문명에 길들여져 그것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공주 시장」에서 시장 좌판에서 비를 맞고 있는 오이는 문명을 거부하고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오이는 화자에게 다시 밭으로 가자고 말한다. ‘밭’은 오이의 집이며 되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좌판에 올라 이미 상품화된 오이가 다시 시퍼렇게 살아 저 살던 밭으로 가자고 한다는 이 진술은 우리에게 본원적인 생명의 근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또한 시인은 제철 과일이 사라진 시대에 아예 시간을 한 두어달 뒤로 물려 오월 햇빛 속에 딸기를 먹고, 칠월 더위 한창일 때 참외를 먹고 싶어하며(「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네」), 닭에게 닭을 먹여 키우는 비정한 문명이 결국은 사람까지 미치게 하지는 않겠느냐(「정말 그럴 수가 있는 거냐」)며 절규한다.
이처럼 본원적인 것에로 ‘회귀(回歸)’하고자 하는 욕망은 『세상에 새로 온 꽃』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점점 더 돌아갈 곳을 잃고 앞으로만 나아가면서 그 회귀의 욕망은 심한 좌절을 겪는다. 이 시집은 얼핏 무기력하고 나약한 한 현대인의 수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시무시한 묵시록을 숨기고 있다. 가령 도시 속에 음침하게 누워 있는 굴뚝의 이미지(「당인리 발전소」), 홍대앞 ‘씨어터 제로’ 4층 건물 옥상에서 오른쪽에 가리마를 하고 앉아 있는 섬뜩한 마네킹의 모습(「씨어터 제로」) 등은 이미 갈 데까지 간 도시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와 그러기에 더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성찰과 경고를 담고 있다.
평론가 홍용희는 이 시집이 “인간의 문명적 삶의 허실”을 드러내면서도 “순진 무분별한 무욕과 자족의 미의식으로 인류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지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평했다.
제1부
인디오의 감자
도토리 농사 1
도토리 농사 2
봄 사월
순진 무분별
사랑과 죽음
모기와 같이 잔 날
염천에 상엿소리
하모니카 소리
공주 시장
관음봉 가는 길
아버지
세상에 새로 온 꽃
생각은 새와 같아서
세상에 새로 온 눈
동물원
제2부
동백의 노래 1
동백의 노래 2
나는 왜 그 전봇대를 기억하는가
사막
차라리 치매이고 싶다
바퀴벌레 사랑법
퇴계의 명아주 지팡이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네
정말 그럴 수가 있는 거냐
봄 사육신묘
봄날
진달래꽃
제3부
그냥 있는 거지요
당인리 발전소
달은 말을 할 줄 모를 거야
아직도 잠들지 못한 저 별은
벙어리 뻐꾸기
한여름 낮의 꿈
벽오동 1
도시의 고양이
홍대앞 풍경
씨어터 제로
밤길
목련
벽오동 2
벽오동과 굴뚝 사이
제4부
제라늄은 끝까지 붉다
무령왕비 어금니에 대한 보고서
쎄라비
너
화병 속의 수선화
처음부터 거기에 늘 있던 나무
겨울 한계령
매화나무 매화꽃
미늘
초여름 안골에서
하일 춘정
겨울 무주 구천동
이십년 저쪽
쓰시마 촌로가 전하는 얘기
노부부
냄새
해설│홍용희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