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분야에 관한 확실한 지식과 안목을 바탕으로 깊이있는 성찰을 담아낸 산문집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을 쓴 나희덕 시인은 4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을 선보였고, 산문집 『반통의 물』을 통해서 촘촘하고 예리한 글쓰기를 보여준 바 있다. 또한 배우고 가르치는 자리에서 무르익은 깊이있는 지식과 평소의 폭 넓은 시 읽기는 이 책을 이론과 감성이 어울린 시 에쎄이집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존의 시론집이 지닌 딱딱한 이론 중심의 서술을 벗어나, 시를 쓰는 현장의 감각과 따뜻한 애정이 살아 있는 시 산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자유로운 문체로 시에 관한 생각을 풀어낸 글들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보랏빛’이란 화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보랏빛은 빨강과 파랑의 사이에 있으면서 어떤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상징한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이러한 보랏빛 균형감각은 이 책 이곳저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우선 「첨단의 노래와 정지의 미 사이에서」라는 글에서 저자는 김수영(金洙暎) 하면 떠오르는 ‘첨단’이라는 용어에 부여된 과중한 의미를 덜어내고 ‘정지’의 의미를 끌어올려 김수영 시세계를 균형 있게 해석한다. 그리고 ‘첨단’과 ‘정지’ 사이에서 절제와 관조를 통해 에너지를 재충전했던 김수영의 시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단에 필요한 지혜라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오늘의 시가 몇개의 이슈나 부류로 선명하게 갈무리되지 않는 현상이야말로 우리 시단이 이루어낸 작은 진보”라고 평하며 “그런 의미의 혼돈과 지지부진함이라면 좀더 충분히 겪어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독특한 시각으로 저자는 ‘중심없는 방황의 시대’로 불렸던 1990년대를 재평가해 이 시대에 이르러 한국시단이 다양성을 성취하고 깊이있고 완만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또다른 빛을 발하는 글이 바로 「낡은 구두와 ‘낡은 구두’」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고(故) 문익환 목사가 평소 신고 다녔던 낡은 구두와 고흐가 그린 ‘낡은 구두’를 저울질하며 체험이 바탕이 된 진실한 예술과 일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예술의 힘을 비교 성찰한다. 저자는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양자의 “역동적 관계”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쓰임에 무관심한 채 낡아갈 때 이상적이 되는 도구(구두)와는 달리, 예술은 끊임없이 자의식을 동원해 그 쓰임에서 얼마만큼 비껴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균형감각은 미당(未堂)의 시에까지 닿아 있다. 같은 글에서 저자는 미당에 대한 역사적인 단죄 못지않게 그의 예술세계를 삶과의 관련성 속에서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고향, 잃어버린 종소리」는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백석과 서정주를 ‘고향’이란 주제 아래 바라본 글이다.
균형감각과 함께 ‘솔직함’이 돋보이는 글들도 여럿 있다. 시가 태어날 때의 그 미묘한 순간을 한치의 가감없이 드러낸 「탄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론」에서 저자는 “사물과 스파크를 일으키며 마찰하는 경험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줄의 시도 쓸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또한 저자 자신의 시를 평가하는 말로 자주 오르내리는 ‘모성성’이라는 단어의 추상성을 반박하고 자신의 시를 예로 들어 모성성이 세계의 ‘불모성’에 대한 반명제로서 성립되었음을 증명한다(「모성성―불모성을 건너는 다리」).
2부에는 ‘자연’ ‘풍경’ ‘여성성’ ‘생태주의’ ‘전통’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 시의 흐름을 짚어낸 글들이 실려 있다.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에서 저자는 근대 이후 시에서 ‘풍경’이 발견되기 시작해 현대시와 와서 그것이 소멸하게 되는 과정을 밝힌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시에서 ‘풍경’의 변천사는 시를 쓰는 주체의 역사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 주체의 탄생으로 ‘자연’은 깊이있는 내면을 통과해 ‘풍경’이 되었으며, 현대시에 와서 주체가 소멸되고 자연의 재현을 거의 포기하게 되면서 자연 자체에 도달하기 위한 관념적 치열성으로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우리 여성 시인들의 시를 꼼꼼하게 읽어낸 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여성’을 ‘자연’과 연결시켜 그것에 혐오감을 부여하는 전통적인 시각을 비판하고 여성의 몸이 지닌 생래적인 생태적 성격을 드러낸 여성 시들에 주목한다. 「전통, 거대한 뿌리의 발견」에서는 협소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전통의 참의미를 찾는 과정을 김수영의 시를 통해 발견해낸다. 특히 김수영의 「巨大한 뿌리」를 전통에 대한 긍정을 넘어, 더러운 전통까지도 끌어안을 만큼 ‘민중’들의 삶에 밀착해 들어간 시로 읽는 부분이 주목된다.
3부에서는 시인이 습작기부터 즐겨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시인 또는 시집에 대한 작품론 10편을 실었다. 따뜻한 애정과 섬세한 시각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글들은 우리 시의 풍요로운 지평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머리에
1부
낡은 구두와 「낡은 구두」
고향, 잃어버린 종소리
탄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론
첨단의 노래와 정지의 미 사이에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모성성―불모성을 건너는 다리
소요 속의 침묵_장석남 시인과 나눈 이야기
2부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전통, 거대한 뿌리의 발견
3부
저기 우리 그림자 가네_정현종의 시
불귀와 미귀의 거리_김지하의 시
물과 불, 그리고 탄생_강은교의 시
시대의 염의를 마름질하는 손_고정희의 시
다성적 공간으로서의 몸_김혜순의 시
탈주와 위장의 글쓰기_장정일의 초기시
어떤 난생(卵生)의 울음소리_김기택의 시
생태적 감수성과 마음이 깊이_최두석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
빈 항아리에 밤비 내릴 때_이홍섭 시집 『숨결』
짜디짠 세상이여, 이 심심한 시들을 받아라_장철문 시집 『바람의 서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