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 이야기

송진헌  지음
출간일: 2003.04.30.
정가: 12,000원
분야: 그림책, 창작
우리 창작 그림책, 어디까지 왔나

 

 

 

 

1988년 출간된 류재수의 『백두산 이야기』는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의 신호탄이었다. 그 뒤로 어린이전문서점과 어린이책 기획을 같이 하는 '초방'에서 기획해 내놓은 정승각의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권윤덕의 『만희네 집』, 이억배의 『솔이의 추석 이야기』 등의 빛나는 성과가 이어졌다. 길벗어린이, 재미마주, 보림 등 국내 일러스트레이터들 중심의 그림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들도 매해 새로운 성과를 내놓고 있다. 류재수가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노란 우산』은 뉴욕 타임즈 선정 '2002 최우수 그림책', 국제어린이도서협의회(IBBY)가 선정한 '50년 통산 세계의 어린이책 40권'으로 뽑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그림책을 펴내고자 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열망은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림책의 역사를 새롭게 쓸 만한 뛰어난 성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 정승각, 이억배, 류재수 등 그림책 전업작가들의 작업이 계속 이어지고, 문학동네 보림 출판사 등의 신인공모를 통해 새로운 작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그림책들은 '그림책'으로서의 독특한 전개방식을 가졌다기보다는 텍스트(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권정생 등 기성작가들이 써놓은 글에서 출발하여 그림책 기획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직도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림 자체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그림책 고유의 특장을 살린 책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송진헌은 내러티브 중심의 '이야기책'이 아니라 그림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그림책 『삐비 이야기』를 자신의 첫 그림책으로 선보인다. 서사구조가 뚜렷한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도 있지만, 『삐비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 어떤 이야기의 힘보다 강력하다.

 

 

 

그림책은 '이야기책'과는 다르다

 

 

 

 

송진헌은 『괭이부리말 아이들』 『너도 하늘말나리야』 『돌아온 진돗개 백구』 『아주 특별한 우리 형』 같은 동화책에 정감 어린 삽화로 책의 감동을 더해주곤 하던 일러스트레이터로, 그의 독특한 흑백 그림은 이미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 책 『삐비 이야기』는 그가 글과 그림을 함께 한, 그림책 작가로서의 첫 생산물이며,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펼쳐낸 작품이다.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마음 한구석에서 비슷한 추억을 떠올리며 글과 그림 모두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만한 그림책.

 

 

군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 작가 송진헌의 동네에는 울창한 측백나무 숲(일제시대에 조림한 숲으로, 지금은 사라졌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곳은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봄이 되면 이 숲에 '삐비'라는 아이가 나타나곤 했다. (훗날 깨닫게 되었지만) 자폐아였던 삐비는 겨울이면 집 안에만 갇혀 지내다가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숲에 나타나곤 했던 것.

 

 

아이들은 말도 하지 못하고 무리에 어울릴 줄도 모르는 삐비를 모두 피해 다니지만, 우연한 기회에 숲에서 삐비와 마주친 '나'는 어느새 그 아이와 친구가 되어 깊은 숲속까지 탐험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숲 밖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이제 '나'만 보고도 피해 다니고, 나 또한 학교에 들어가면서 삐비와는 점점 멀어지는데…

 

 

이 책 『삐비 이야기』를 위해 송진헌은 2년간 쉴 틈 없이 연필을 놀렸고, 수도 없이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무채색이지만 그 어떤 화려한 그림보다 호소력 있는 흑백그림들은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몰고 가며,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 쓴 절제된 문장은 안타까움에 가슴 한켠이 아파오게 한다.

 

 

작가가 자신의 첫 그림책에 들인 공만큼,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제작에 들인 공 또한 만만치 않다. 우선, 흑백그림이지만 2색 인쇄를 했다. 기본적인 흑색판에 회색 계열의 색판을 하나 더 만들어 인쇄한 것. 덕분에 블랙이 주는 다소 날카로운 느낌이 회색의 베이스로 인해 완화되고 중간톤의 그림자가 스며들어가 원화의 따스함과 풍부함이 잘 전달되었다. 본문과 표지 용지 또한 매트한 느낌의 고급수입지를 사용해 가느다란 연필선 하나하나가 잘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제본 과정에서도, 펼침면이 많은 이 책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한면 한면이 잘 펼쳐지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삐비, 외로운 아이들의 표상

 

 

 

 

작가 송진헌은 '삐비'가 실질적인 신체·정서적 장애를 지닌 아이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내는 모든 아이들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우리 주위의 소외된 아이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송진헌은 앞으로도 기획 글 그림을 함께 한 그림책들을 계속 펴낼 생각이다. 영유아용 책에서부터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그림책까지, 내용은 물론 기법과 재료 면에서도 좀더 다양한 모습들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하니, 그의 독특한 작가정신을 계속 따라가보는 일도 매우 흥미로울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