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장편『폭설』은 장편소설『풋사랑』이후 10여년 만에 펴내는 장편이며, 소설로는 『내 마음의 망명정부』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작품이다. 김영현은 섬세한 필치로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담아내며 지식인의 우울하지만 정직한 고뇌를 깊이 응시하는 문제작들을 발표해왔다. 주지하듯이, 김영현의 소설은 1980년대 문학이 1990년대 문학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를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90년 평론가 권성우 정남영 등에 의한 소위 '김영현 논쟁'으로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폭설』의 주인공 장형섭은 변혁운동에 몸담았던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은 격동적인 시대의 흐름과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을 함께 포착하는데,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이력이 밀접히 관련된다. 김영현은 서울대 철학과 4학년이던 1977년 가을에 시위 예비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979년 5월에 가석방되었다가 그해 9월 반강제로 군에 입대하였고 1982년 전역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황폐한 현실을 견디는 인물들의 고뇌를 그리고 고문의 비인간성을 묘사하며 오랜 격리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과 대면한 자의 정신적인 방황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작가는 섬세한 연민의 시선으로 어두운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의 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해가며 혼돈의 시대를 가로질러가는 사람들에 대한 반성적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김영현 작품 특유의 격정적이면서 따뜻한 분위기와 미세한 마음의 무늬를 펼치는 정갈한 문장 역시 여전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 작품 줄거리
전역식을 마치고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강원도 산길을 내려오던 장형섭은 박동식과 만나 눈길 십리를 함께 걸어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잠으로 소일하던 형섭은 읍내 우체국에 갔다가 초등학교 후배 문미경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지난날의 감정이 살아난다. 어느날 형섭의 고향집으로 형사가 찾아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형섭의 동태를 파악하고 가고, 이를 계기로 형섭은 서울로 가기로 한다. 형섭은 서울로 가기 전 미경의 아버지 문용탁 선생을 만나뵙고 작은 공동체 '두레농장' 구상에 대해 듣는다.
형섭은 대학 친구 연희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큰 짐을 지고 있다. 형섭은 대학시절 구로공단에서 위장취업중이던 자신을 찾아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한 연희를 그냥 돌려보내고, 얼마 뒤 급습한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2년 넘게 실형을 산다. 수감생활 내내 연희는 책을 넣어주며 안부를 전해왔다. 출감 후 바로 이어진 입영통지에 어리둥절할 사이도 없이, 연희 어머니가 찾아와 다시는 연희와 만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간다. 형섭은 어떤 힘에 밀려 연희에게 아무 말도 않은 채 입영하였고, 그리고 얼마 전 제대를 한 것이다.
서울로 온 형섭은 친구 동만과 후배 민수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친구 홍석태의 출판사에서 번역일을 얻어 생활한다. 그러다 우연히 석태의 여자친구 안혜숙으로부터 연희 소식을 듣는다. 연희가 지금 지하조직 열심당이란 과격단체를 이끄는 성유다란 자의 애인이 되어 수배중이란 소식이다. 형섭은 기찻길이 내려다보이는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어느날 연희 어머니가 정보부 박부장이란 사내와 함께 나타나 소식이 끊긴 연희를 찾아달라는 원망섞인 부탁을 하고, 박부장은 연희의 상황을 설명하며 은밀히 형섭을 이 일에 끌어들인다.
연희와 만나기 위해 혜숙과 계속 연락을 취하던 형섭은 윤애림이란 여자를 만나게 된다. 지하조직을 이끌고 있는 성유다의 옛애인이자 연희를 유다에게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한 애림은, 쫓기던 와중에 형섭을 찾아왔다가 돌아간 뒤 경찰에 체포된다. 이 일에 박부장이 연관된 사실을 형섭은 눈치채지 못한다. 한편 어렵게 성사된 연희와 유다와의 만남에서 연희가 유다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된 형섭은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유다와 연희가 급습을 당해……
80년대 초를 배경으로 모순이 가득한 시대, 격동의 세월을 돌파해가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애틋한 청춘남녀의 파란많은 사랑의 결들이 작가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체 속에 한껏 살아나는 이 작품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환기시키면서, 보잘것없는 일상을 살아가며 남루하게 변해가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다.
눈길
벚꽃 아래로
어둠의 심연
사막을 건너는 법
철길이 보이는 창
아주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빛과 그림자
너에게로 가는 길
세상의 안과 바깥
겨울여행
이별 없는 사랑
겨울과 봄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