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집은 현대문학상 수상작 「고갯마루」를 비롯하여 여러 문예지에 발표된 열 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혜경은 이미 첫 소설집 『그 집 앞』과 장편 『길 위의 집』에서 우리 삶의 낮고 후미진 곳을 치밀하게 들춰내며 독자들을 고통스러운 진실로 차분하게 이끌어가는 빼어난 솜씨를 보여줘 문학성을 인정받아왔다. 이번 작품집에서도 신산스러운 삶의 굴곡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다채로운 호흡을 느끼게 하는 유려한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따뜻하지만 감상적이지 않고, 다감하면서 또한 치밀하며, 충만하되 결코 넘치는 법이 없"는(진정석) 이혜경 소설의 특징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표제작 「꽃그늘 아래」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의 2년여간의 체험이 효과적으로 녹아든 작품이다. 갑자기 죽은 애인 영모의 넋을 찾아 서울에서 족자카르타에 온 여인 서연은 그곳에서 영모를 짝사랑한 후배 윤지를 만난다. 귀신의 세계와 밀접한 듯한 족자카르타의 묘한 분위기와 발리에서의 화장 장례식을 접하며 서연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진 상처들을 마주하게 된다. 섬세한 마음의 실마리를 타고 흐르던 이야기는 다음의 마지막 대목에 이른다. "(…) 하수구로 빨려들어가는 물. 물은 한국에서와 반대방향으로 소용돌이쳤다. 적도 아래쪽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채 건져내지 못한 꽃잎 몇장이 흘러내렸다. 물이 빠지는 바람에 욕조 안쪽 네 면에 점점이 붙은 그것은 발자국, 아주 작은 발자국 같았다."
「고갯마루」는 집안의 재산을 거덜내버린 허랑방탕한 큰오빠의 몰염치를 견뎌내는 여성화자 '내'가 학습지 방문교사로 5년 만에 고향을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에서 나는 큰오빠의 실답지 못한 인생이나, 타성바지로 흘러들어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다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데기 명재의 삶, 누추해져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여기서 나는 "조용하지만 극심한 분노"와 "연민"과 "화해"(정홍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현대문학상 심사평에서 김화영 교수는 이혜경 소설의 특장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하나는, 어느 작품도 금방 눈에 튀는 돌출적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높이의 격조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점, 그 둘은, 그의 작품을 두번 세번 반복하여 읽는 독자에게 점차로 그 곱씹는 맛을 배가시켜줄 만큼 한땀 한땀 떠가는 문장의 감칠맛이 이야기 내용과 하나를 이루면서 이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 형성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삶의 조각조각난 모습을 큰품으로 껴안으려는 연민과 사랑의 깊이가 작품의 여운을 더욱 깊고 길게 이끌어간다는 지적으로서, 이 단편을 잘 설명해준다.
「봄날은 간다」 「멀어지는 집」 「대낮에」 「검은 돛배」도 낯익은 일상에 감춰진 삶의 이러저러한 허위와 오류를 아프게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다. 「봄날은 간다」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종애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때문에 혹독한 가슴앓이를 하는 지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멀쩡한 가정에 숨어 있는 폭력"(정홍수)을 대화와 침묵 속에 담아내고 있다. 모녀관계를 다룬 「멀어지는 집」은 "육식공룡"처럼 딸의 존재를 위협하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서 멀어지고픈 딸의 마음의 동요를 날카롭게 그려낸 이채로운 작품이다.
평온한 가정에 갑작스레 나타난 '나쁜 피'를 가진 시아버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대낮에」는 우리 일상의 바닥이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주고 있다. 핏줄에 흐르고 있는 폭력성과, 피붙이를 외면하는 데 대한 근원적 죄의식으로부터 도망가서 결국 자신을 숨기고 위태위태한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지, 그 결말은 참으로 매섭게 느껴진다. 「검은 돛배」는 자신이 정성을 다해 수발하던 남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장례식에서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는 이야기이다.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후 습관적으로 남자를 구타하던 못 배운 여자 '나'는, 청승과 수다에 실어 삶의 신산함을 털어놓고 있다.
이렇듯 표면적 인간관계 속에 숨겨진 불안과 외로움들을 날카로운 언어와 침묵의 여백으로 엮어가는 작가 이혜경이 독자를 생각하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마음가짐을 보자. "어떤 이에게는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잔 값에 지나지 않는 책 한권, 그러나 자신을 위한 책 한권을 마련하는 일에도 짧지 않은 주저와 망설임을 거치는 당신이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당신이 하고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집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등줄기가 시리다.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고 부실한 자재를 사용한 건물 (…) 이 책을 읽고 난 당신이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면 어떡하나…… 불행히도 책은 가전제품이 아니라서 애프터써비스가 불가능하다. 다만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
문학평론가 진정석이 지적하듯 이번 소설집은 "어느 한군데 치우침이나 편벽됨이 없이 스스로 깊어져가는 이혜경 소설의 한 진경을 보여주는 노작"임에 틀림이 없다. 잔잔하고 차분한 문학적 감동이 날로 귀해져가는 요즘 세태에 소설의 은은한 향기를 즐길 줄 아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작가의 말
꽃그늘 아래
멀어지는 집
고갯마루
일식
대낮에
봄날은 간다
검은 돛배
언덕 저편
내게 바다 같은 평화
어귀에서
해설 | 정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