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적 보편주의

책 소개

『근대세계체제』『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신간 저서다. 대중강연을 단행본 형식으로 정리한 책으로 일반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따라 읽을 수 있는 장점을 지녔으며, 우리가 전지구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라고 믿는 것들이 실제로 전지구적인가에 대해 묻고 있다. 월러스틴은 이 책을 통해 보편적이라고 인식되는 가치나 윤리 역시 역사화해 사고하여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진정한 보편주의를 견인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한다. 국제사회의 약소국에 대한 개입 정당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경계, 이행의 시대를 통과하는 지식인의 역할 등 21세기 지구화시대의 화두에 대한 월러스틴의 진지하고도 통쾌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유럽적 보편주의 대 보편적 보편주의

 

 

 

2003년 이라크를 상대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이 일으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의 확산’이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당시에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자유의 확산’이라는 레토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반(反)레토릭’으로서 기능했다. 북한을 고립시켜야 하는 명분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제기하는 ‘인권’의 문제는 어떠한가. 19세기와 20세기초 제국주의시대에도 제국 팽창의 명분이 ‘문명의 빛’을 세상에 비춘다는 계몽주의의 확산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성’ ‘자유’ ‘인권’ 등의 보편주의 담론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정치성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담론이 적어도 16세기 이후로 근대세계체제의 역사 내내 강자들의 기본적인 레토릭을 구성해왔으며, 결국에는 편파적이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strong> ‘유럽적 보편주의’(european universalism)</strong>일 뿐임을 강조한다.

 

자연법에 기초하고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 문명화된 서구가 타자에 대해 우월하다는 인식에 입각한 유럽적 보편주의는 결국 현실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착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보편주의의 정치성’을 낱낱이 밝혀내면서 그가 <strong>‘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salism)</strong>라 일컫는 진정한 보편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옳다고 믿어온 정당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지, 그리고 진정으로 집단적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전지구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더불어 월러스틴은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의 싸움을 현세계의 핵심적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이해하고 그 결과가 향후 세계체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될 것임을 역설한다.

 

 

 

 

 

누가 개입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월러스틴은 이 문제를 사유하면서 16세기 에스빠냐가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할 당시에 벌어진 유명한 논쟁 장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에스빠냐의 식민지경영제도 ‘엥꼬미엔다’를 둘러싼 ‘라스 까싸스-쎄뿔베다 논쟁’이 바로 그것인데, 당시의 핵심쟁점은 현재 세계정치의 쟁점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에스빠냐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배해야 하는 네가지 이유로 쎄뿔베다는 타자의 야만성,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는 관습의 근절, 잔인한 타자 속의 무고한 양민 보호, 보편적 가치의 전파를 들었다. 이런 논리에 반대했던 주교 라스 까싸스는 고대 로마인들이 에스빠냐의 선조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음을 상기시켜 그것이 얼마나 순진하고도 상대적인 개념인지 선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에스빠냐를 비롯한 서구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사법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의 밀로셰비치 재판, 21세기의 싸담 후세인 재판을 거쳐온 우리는 다시 한번 보편주의의 기치를 들고 사법권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으며 그것은 과연 전적으로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세계의 지배자들은 16세기에는 ‘야만’에 맞선다고 주장했고, 현재는 ‘독재정치’에 맞선다고 주장한다. 월러스틴은 그러한 지배자들의 인식론적 토대에 자리잡고 있는 고질적인 오리엔탈리즘을 문제삼는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20세기 후반 반식민주의 운동의 결과로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고 탈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인식론적 근거가 상당히 취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문제는 기존의 인식틀에 대한 해체와 비판을 기반으로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비(非)오리엔탈리스트가 될 수 있는 인식틀에 대한 합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다. 그 해답은 유럽중심적 보편주의의 위계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다. 서구적 ‘근대성’을 둘러싼 지식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은 옥시덴탈리즘으로의 편향도, 상대주의적인 해체도 아니다. 따라서 ‘근대화된’ 서구에 대한 동경이나 모든 체계나 가치를 전부 특수한 것으로 되돌려버리는 초특수주의(super-particular) 역시 경계의 대상이 된다. 오히려 그 실마리는 지식구조를 현재 세계체제 구조 안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화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지식을 연대기적으로 무한히 축적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큰 맥락, 즉 그 현실이 작동하고 있는 역사적 구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익숙한 것을 벗어나는 최초의 사태는 막연함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창조적 전환은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고 보편적인 것을 특수화하는 변증법적 교환을 통해 새로운 종합에 이르는 것인 동시에 자연과학/인문학으로 나뉜 물화된 학문적 이분법을 넘어서 새롭고도 통합적인 지식구조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보편적인 윤리의 기획은 가능한가

 

 

 

월러스틴은 현세계 지배세력의 새로운 레토릭으로 ‘인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인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아무런 정부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들춰낸다. 오히려 ‘개입’의 근거로 서구에 의해 전유된 보편주의 가치는 특정한 세계체제에서 지배층이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평등한 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강자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넘어서 인간성의 새로운 윤리적 기획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보편주의를 둘러싼 앞으로 다가올 20년에서 50년 사이의 싸움은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의 결정적인 헤게모니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며 동시에 분명한 윤리적 선택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방향을 타진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물론 지식인이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강자들로부터의 압력을 견디는 일이며 초조하게 변화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답답하게만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이행은 언제나 어려운 과정이며 적확한 분석만이 미래의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의 시기를 지나 보편적 보편주의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며 역사적 분석의 깃발을 놓지 말자는 그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더 시대의 요청으로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목차

서문 오늘날의 보편주의 정치

제1장 누구의 개입할 권리인가
야만에 맞서는 보편적 가치들

제2장 비(非)오리엔탈리스트가 될 수 있는가
본질주의적 특수주의

제3장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아는가
과학적 보편주의

제4장 이념들의 권력, 권력의 이념들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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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매뉴얼 월러스틴

    ‘세계체제 분석’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 석학 월러스틴은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컬럼비아대에서 아프리카 연구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 맥길대, 뉴욕주립 빙엄튼대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고 페르낭브로델센터 명예소장, 예일대 수석연구학자, 국제사회학회(ISA)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9년 8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월러스틴은 개별 국가 단위를 넘어 중심부-주변부의 비대칭적 분업체계로 세계 자본주의 구조와 역사를 분석한 논쟁적 저서 『근대 세계체제』(4권)로 사회과학계의 세계화 담론을 주도해왔다. 한국에 소개된 저서로는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반체제운동』(공저)『자유주의 이후』『사회과학의 개방』(공저)『이행의 시대』(공저)『유토피스틱스』『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미국 패권의 몰락』『지식의 불확실성』 『유럽적 보편주의』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공저) 등이 있다. 그외 주요저서로는 The Capitalist World-Economy, the Politics of the World-Economy, Geopolitics and Geoculture, Africa and the Modern World(공저), Race, Nation, Class(공저) 등이 있다.

  • 김재오

    영남대 영문과 교수. 서울대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반년간지 『안과밖』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 『유럽적 보편주의』 『윌리엄 모리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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