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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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그는 ‘전방위’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시 소설 평론 어느 하나에 평생 매진해도 주목받기 쉽지 않은 판에, 그가 쓰면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모두 호평을 받았다. 그는 두 권의 시집으로 독특하고 낯선 서정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는 시인이며,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감각을 앞서 옹호하는 눈 밝은 평론가이며, 첫 장편으로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한 소설가이다. 그가 4년 동안 발표해온 단편소설 역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나 있어, 이미 2010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고 ‘제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단편 8편이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으로 묶였다.

 

그의 소설은 단정하고 단단한 문장과 선명한 이미지, 잘 짜인 구성으로 먼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어느 틈에 일상과 환상, 진실과 거짓, 실체와 허상을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혼란에 싸인 채, 한편 불편하면서도 다른 한편 아련한 어떤 감각에 공명하게 되고, 그가 보여주는 소설의 또다른 매력에 주목하게 된다.

 

 

 

진실과 거짓의 틈에서 피어나는 낯선 감각

 

 

 

혹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소설이 난해할 거라는 선입관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첫 단편 「동경소년」을 읽으면서 의외의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비 내리는 토오꾜오 뒷골목의 허름한 여관에서 시작하는 「동경소년」은 미스터리 소설의 익숙한 형식을 빌려 읽는 이를 몰입하게 한다. “그런데…… 나의 유끼는…… 정말 죽은 걸까요.” 희미한 존재감을 지닌 ‘유끼’라는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고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시종 수상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리고 마침내 유끼가 남자의 눈앞에서 정말로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대목에 이르면, 이 남자의 진술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은 그 의심을 해소해주지 않은 채 기담(奇談)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끝나지만, 그 끝에 남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불가사의하면서도 서늘하고 애잔한 잔상이다.

 

허구와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놓는 그의 장기는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에 선정되고 ‘제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단행본 출간 전부터 이미 주목을 끈 단편 「변희봉」에서 능청스러우리만큼 교묘하게 발휘된다.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주인공 만기는 얼마전부터 배우 변희봉을 여러번 실제로 마주치지만, 주위의 어느 누구도 변희봉이라는 사람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다. 소설에서는 신산하기 그지없는 삶에 지친 만기가 착각을 일으킨 것처럼 여겨지고, 그런 만기의 진술은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상하게도 소설 속에서는 누구도 변희봉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플란다스의 개>의 경비가 장항선이고 <괴물>의 아버지가 김인문인 것으로 되어 있다. 소설 밖에서는 분명 실존인물인 배우 변희봉이, 소설 속에서는 완전히 가상의 인물이 되어 있는 것. 죽어가던 만기의 아버지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대목에 이르러, 소설은 혼란스러워하는 독자를 한번 더 교란시킨다. “만기야…… 니 밴…… 히봉이라고…… 아나?” 이때 변희봉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말 역시 만기의 착각일 뿐인가. 그런 의문 속에서, 야간 야구경기 중계 도중 불빛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야구공이 이들의 머리 위로 날아온다. 실은 어쩌면 그 야구공이야말로 이 소설 전체의 아름다운 해답이기도 하다.

 

「변희봉」이 일견 희극적이라면, 표제작인 「고백의 제왕」은 악마적인 분위기를 띤다. 눈 내리는 송년회 자리에서 동창들이 대학시절 ‘고백의 제왕’이라 불리던 곽(郭)이라는 친구를 불러낸다. 눈에 띄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믿기 어려운 고백들은 사람들을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불우한 가족사에서 시작한 그의 고백은 점차 주변인물들이 얽힌 불편한 고백으로 이어졌고, 친구들은 그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자 개인적으로는 때때로 곽을 만나 고백을 주고받았음이 밝혀지고, 마침내 곽이 자리에 나타나자 모두들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앞다투어 비밀스러운 고백을 털어놓는다. 그 ‘고백의 제왕’의 고백이란, 진실인지 아닌지 확증할 수 없지만 듣는 이의 욕망과 얽힌 불편한 진실을 들추어내는 위력을 지닌 고백이다. 그것은 곽의 고백을 전해듣는 독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고백은 우리에게 소설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욕망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어내는 힘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의 소설은 허구와 진실, 가상과 현실을 겹쳐놓고 비틀어놓음으로써 둘의 관계를 되물으며, 그 틈새에서 다른 차원의, 말로 할 수 없는 실재를 우리 눈앞에 불러낸다.

 

그것이 ‘공간’이라는 선명한 상징으로 드러난 것이 어쩌면 「아르마딜로 공간」이다. 「아르마딜로 공간」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아르마딜로 공간’이라는 장소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곳은 ‘지난해의 여름을 달려가던 택시’가 ‘25년 전의 겨울을 걸어가던 여자아이’와 부딪치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어긋나고 겹쳐지는 우연한 지점이다. 소설은 그 ‘아르마딜로 공간’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죽음들과 관련된 사연을 들려주면서, 관찰자인 한 인물의 트라우마를 희미하게 내비친다. 말하자면 ‘아르마딜로 공간’이란 누군가의 허구적인 내면이면서 동시에 실재하는 공간인 셈이며, 그런 점에서 「변희봉」의 ‘변희봉’이라는 기표도, &#65378;고백의 제왕」의 ‘고백’ 또는 ‘고백하는 입’도 또다른 ‘아르마딜로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은 어둡고 고요한 진심만이 남는 것”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그것을 “익명의 중얼거림, 실체 없는 비존재, 환영, 이미지, 그림자” 곧 “유령적 (비)존재”라고 이름붙인다. 유한하고 자명한 주체가 사라진 곳에서 무한하고 불안한 밤의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들 말이다. 과연, 「곡란」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면에서 모두 죽음에 들린 채 밤의 세계를 방황하는 존재들이다. 「곡란」에서는 자살 싸이트를 통해 죽음을 결심한 이들이 모인 여관방에 과거의 환영들이 출몰하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들은 모두 스스로 유령인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기차 방귀 카타콤」의 주인공 역시 딸과 아내의 죽음에 사로잡힌 채, 아내의 유령과 함께,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닌 비존재의 공간이라 할 카타콤으로 향한다. 또다른 단편 「안달루씨아의 개」에서 ‘옹(翁)’이 삶과 죽음을 테마로 한 영화를 강의할 때 학생들의 하품하는 입에서 보는 것, “죽음과 유한성을 잡아먹고 헌신과 영원한 가치를 지운 후 옹을 향해 몰려”드는 “검은 안개” 역시 그와 같은 비존재의 현현이다. 그 ‘검은 안개’는 ‘고백의 제왕’ 곽의 입에서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고백을 시작하려는 듯, 곽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곽의 벌어진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검고 깊게 뚫린 동굴 같았다.”

 

하지만 그 어둠이 곧 죽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변희봉」에서 만기는 연극의 대사를 빌려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생은 왜 빛이며 죽음은 왜 어둠인가. 삶은 오히려 어둠의 편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일상이라는 밝은 낮 속에 죽음과 같은 어둠이 깃들어 있고, 죽음의 세계인 어둠 속에 삶의 순간들이 드러나는 밝은 틈이 있다. 『고백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죽음에 들려 있는 어두운 존재들이고 유령 같은 존재들임에도 이 소설들이 모두 음산하고 무겁기보다 투명하고 단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투명하고 단정한 그의 문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하게는 만기의 저 질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르마딜로 공간’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소설에서는 신산하고 누추한 삶과 불안하고 두려운 죽음이 구분 없이 공존하고, 서로 겹쳐지고, 마침내 지워진다. 그리고 그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투명하고 선명한, 말로 하기 어려운 낯선 감각이다. 「변희봉」의 마지막 장면에서, 캄캄한 하늘 위로 떠오른 야구공은 눈부신 조명이 교차하는 한가운데서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만기의 이야기가 끝난 후, 야구장이 사라지고 공터만 남은 동대문운동장 쪽에서, 야구공 하나가 날아온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슬프고 거짓말 같아도 그 단단한 야구공만큼은 진짜다,라고 『고백의 제왕』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백의 제왕』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지우면서 일상 속에 깃든 균열과 어둠을 응시한다. 그 균열과 어둠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되물음을, 나아가 소설의 근원에 관한 되물음을, 나아가 그의 ‘낯선 감각과 첨예한 자의식’(진정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발견은 불편하지만 어딘가 아련한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쉽게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뿜어낸다. ‘시인 이장욱’과 ‘평론가 이장욱’과는 또다른, ‘소설가 이장욱’의 매력이다.

목차

동경소년
변희봉
고백의 제왕
아르마딜로 공간
기차 방귀 카타콤
곡란
밤을 잊은 그대에게
안달루씨아의 개

해설·권희철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장욱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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