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들

책 소개

동시대의 미학과 사회참여를 설득력있게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를 받는 현대 독일의 대표작가인 카타리나 하커(Katharina Hacker)의 독일도서상 수상작 『빈털터리들』(DIE HABENICHTSE)은 사랑, 열정, 관심,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린 세대의 끔찍한 초상을 그려 보이며 물질만 남은 영혼의 초상을 보여준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삼십대 전문직 부부를 주인공으로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궁핍하기만 한 현대의 인간군상을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소유와 존재의 문제를 제기한 이 작품은 열정 없이 무감하게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집 건너 사는 이웃들은 차라리 밑바닥 인생을 살지만 가슴에 동정과 연민을 품고 있다. 작가는 이런 대비를 통해 죄의식과 책임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면서 이 극단의 인물군 사이에서 희생당하는 세계에 주목한다. 소설의 제목인 ‘빈털터리들’은 사회적 하층계급의 물질적 빈곤과 연관된다기보다는 내적으로 결핍한, 부유한 주인공들이 진정한 ‘빈털터리들’임을 암시한다.

 

 

 

이자벨과 야콥은 대학시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하룻밤 인연을 맺은 사이로 10년 뒤 각기 디자이너와 변호사가 되어 베를린의 어느 파티장에서 우연히 재회하고, 야콥은 이자벨과 만나기 위해 9월 11일 뉴욕무역센터에서의 약속을 앞당겨 테러 현장을 피하게 된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두 사람은 직장 때문에 런던의 레이디 마거릿 가로 이사하는데, 런던에서의 그들의 결혼생활은 사랑이 없고 냉랭하기만 하다. 이들의 옆집에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부모와, 데이브와 쎄러 남매가 살고 있다. 옆집에서 종종 들려오는 매질 소리에도 이자벨 부부는 무감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이자벨은 같은 동네에 사는 스물여섯살짜리 마약밀매범 짐에게 빠지고, 야콥은 동성애 기질이 다분한 앨리스테어와 사귀고 자신이 다니는 법률사무소의 대표인 벤섬에게 사랑을 느낀다. 짐은 조직의 우두머리인 앨버트에게 꼼짝 못하고 유일한 희망이자 위안인 여자친구 메이마저 떠나보내는 신세로 밑바닥 인생의 전형이지만 적어도 불감증 환자는 아니고, 유대계 이민자인 벤섬은 역사의 피해자이자 런던의 주류사회에 편입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 소유와 상실을 폭넓게 경험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자벨과 야콥의 열정 없고 무감한 생활은 결혼생활뿐 아니라 두 사람은 각자의 연애관계에서도 연인들에게 희미한 사랑의 감정만 지닐 뿐 그 누구에게도 모든 것을 걸지 않고 거리를 둔다. 그러던 중 이자벨은 옆집 여자아이인 쎄러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를 실수로 죽이고, 이 장면을 목격한 짐은 이자벨을 혐오하게 된다. 고양이를 찾아 길을 헤매는 쎄러를 집으로 데려온 짐은, 자신을 찾아온 이자벨에게 쎄러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쎄러를 돌보라고 하지만, 이자벨은 전혀 내켜하지 않는다. 이자벨과 짐이 다투고 짐은 런던을 떠난다. 이자벨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된 쎄러를 돌보지 않고 내버려둔다. 집으로 돌아온 이자벨은 무감하게 경찰에 신고하고 집에 돌아온 야콥을 맞는다.

 

 

 

 

 

모든 것을 소유했으나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들

 

 

 

삼십대 중반의 이자벨과 야콥은 그래픽 디자이너와 변호사로 번듯한 직장에 외형적으로는 빠질 것이 없는 부부지만 가슴에는 열정이 없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현대 유럽 지식인의 내면풍경을 대변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시종 일말의 감정개입 없이 냉정하고 담담하다. 또한 런던과, 하층민들의 거주지인 레이디 마거릿 가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살고 있으나 서로 관계맺기를 거부한 채 무관심하고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그 중심에는 이자벨과 야콥 부부가 있다. 이웃집 꼬마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를 죽이고도 별다른 죄의식도 없고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만 하는 이자벨을 향해 마약밀매범이자 이웃에 사는 그녀의 내연남 짐은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 못해. 당신은 세상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는 걸 몰라. 그건 흉터처럼 화끈거리는 거야”라고 소리친다. 직장 상사인 벤섬을 흠모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 야콥에 대해서 작가는 “그는 받지도 주지도 않는 어떤 존재였고, 그의 관심 자체는 순수했지만 그의 직접적인 참여는 착각일 뿐이었다. 그는 검버섯이 난 피부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고 싶지는 않았다”라고 묘사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력이나 직업적인 성공 말고는 그 무엇도 열망하지 않고 상상하지도 않는다. 야콥과의 십년 만의 재회를 앞둔 이자벨의 모습은 매사에 무감하고 무정한 모습의 단면이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고 거리와 쇼윈도는 우윳빛이었다. 통행자들은 엷은 천 뒤로 몸을 숨긴 듯했다. 자신을 숨기는 것 말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다녀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자벨은 신발가게 앞에 멈추어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 이자벨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오늘 저녁 데이트가 있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저녁이라고요? 여점원이 다시 확인했다. 이자벨이 마치 장례식 이야기라도 한 것 같은 어투였다.

 

 

 

내면의 공허함을 메워줄 자극적인 대체물로서 섹스를 구걸하는 이자벨에게 짐은 다시 선언한다. “당신은 가는 데마다 구걸하는 거야? (…)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당신은 블랙홀이야. 그 안으로 쏟아부으면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구멍이란 말이야.” 그들의 공허함은 비단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이웃 혹은 이웃 나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을 채워줄 첨단의 라이프스타일을 구매하기에 바쁘고, 전쟁 발발 소식에 생필품을 비축하고 그것을 자랑이라 떠벌리며, 전쟁터도 아닌 런던에 있는 친지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하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무관심과 무감함이 극에 달한다. 이웃집 쎄러의 고양이를 죽인 이자벨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짐을 찾아가지만 이자벨이 고양이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짐은 현실에 발딛지 않고 무감하게 사는 그녀를 비난한다. 화려한 외면과 달리 그녀 역시 짐처럼 하찮고 비루한 존재인 것이다.

 

 

-밤이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증오심 반 호기심 반으로, 그녀의 위치와 입장을 자기가 정해야 한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이 고양이를 아래로 밀어버리고는 창문을 닫았어.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 못해. 당신은 세상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는 걸 몰라. 그건 흉터처럼 화끈거리는 거야. 우리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고, 결코 무엇인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래봤자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우리가 딴 데로 몸을 돌려버리든 바로 쳐다보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기록에 남아 있어. 본인이 알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야. 내가 당신을 봤잖아.

 

 

한편 고양이를 찾아나섰다가 길을 잃은 쎄러는 오빠 데이브와 함께 만난 적이 있던 짐에게 이끌려 그의 집에 갔다가 이자벨을 만난다. 짐과 이자벨의 다툼 와중에 쎄러가 크게 다치자 짐은 이자벨더러 쎄러를 돌봐주라고 강요한다. 그렇게라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자벨은 끝내 아픈 쎄러를 방치한 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경찰에 신고한다. 결코 자신을 다치지 않는 자의 모습, 자기 자신 외에 남을 수용할 수 없는 존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카타리나 하커는 이 소설을 통해 동세대의 가장 재능있는 작가임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역사의식을 추구하는 유럽의 전통적 소설기법의 정점에 도달했다(『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작가는 직업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모든 것을 소유했으나 사회공동체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돌볼 능력을 결여한 인물상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또한 냉정하면서도 우아한 언어와 다층적인 화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면서 점점 더 섬뜩해지는 동시대의 현실을 폭로한다.

 

‘독일도서상’(Der Deutsche Buchpreis)은 독일서적상출판인협회가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영국의 부커상에 비견할 만한 독일의 문학상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직전에 발표하는 독일 유수의 문학상이다. 카타리나 하커의 『빈털터리들』은 2006년 독일도서상 수상 소식으로 『슈피겔』 지뿐 아니라 각종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목차

빈털터리들

옮긴이의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카타리나 하커

    196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와 예루살렘에서 철학과 역사 그리고 유대학을 전공했다. 1997년 소설 『텔 아비브』(Tel Aviv)로 등단하여 『모르페우스 또는 뾰족한 신발』(Morpheus oder Der Schnabelschuh, 1998) 『수영장 관리인』(Der Bademeister, 2000) 『일종의 사랑』(Eine Art Liebe, 2003)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동시대의 사회참여와 역사의식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한 현대 독일의 대표작가로 평가받으며 2006년 『빈털터리들』로 제2회 독일도서상을 수상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 장희창

    서울대 언어학과와 같은 대학원 독어독문과 졸업했다. 현재 동의대 독어독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옮긴 책으로 『괴테와의 대화』 『색채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양철북』 『게걸음으로 가다』 『책그림책』 『현대시의 구조』 『약자들의 힘』 『미메시스에서 시뮬라시옹까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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