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리본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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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P align=justify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등단한 이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권여선의 신작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이 출간되었다. 지난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던 「가을이 오면」과 2007 이상문학상 우수작인 「약콩이 끓는 동안」을 비롯, 일곱 편의 신작 단편이 담겨 있다.

 

<P align=justify />권여선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세상 속에서 안정된 직업을 갖지도 못하고 사회 속에서 추구하도록 강요된 특별한 욕망을 지니지도 않은,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들이다. 대개 이들은 사회적으로도 중심에서 벗어나 외면당한 여성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캐릭터는 소설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물일곱의 늦깎이 전문대생 ‘로라’(「가을이 오면」)나 서른 문턱을 넘은 나이에 하는 일 없이 신도시 오피스텔에 이사와서 지내는 여자(「분홍 리본의 시절」), 반신불수 노교수의 집으로 연락조교 노릇을 하러 다니는 대학원생 ‘윤양’(「약콩이 끓는 동안」) 등. 권여선은 이처럼 사회가 덧씌운 역할이라든가 욕망을 걷어내고 그 인간 자체의 선악과 미추를 고스란히 드러내려 한다. 권여선의 인물들이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냉소이지만 세상에 대해 냉소하는 자기 자신까지를 가차없이 반성하고 해부하는 서늘함이 서려 있다. 허위를 거부하는 날선 이 소설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와 냉정한 자기반성을 동시에 안겨준다.

 

<P align=justify />표제작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예전 대학 선배와 그의 아내를 우연히 만난 ‘나’는 그들과 음식을 해먹으며 점점 친해진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나’는 서서히 선배와 그의 아내, 중산층인 그들의 삶에 대해 혐오와 불쾌와 동정을 느낀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던 선배 부부는 고기 요리를 만들 때마다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자신들의 말이 위선이었음을 드러낸다. ‘나’는 선배의 소개로 김수림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선배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고, 아이를 떼내는 동안 ‘나’는 그녀를 돌보며 선배에게, 수림에게, 선배의 아내에게 환멸을 느낀다. 소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누가 하는 말인지 확실치 않은 폭발적인 비난으로 마무리된다. “네가 진정 가슴을 치고 울어본 적이 있느냐. 남자나 실연 때문이 아니라 네 하찮음, 네 우열함, 네 교정되지 않는 악마성 때문에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삶을 저주해본 적이 있느냐.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죽음밖에, 그 무서운 백지의 차원밖에 남지 않았음을 절감해본 적이 있느냐. 하루하루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인 시체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느냐.” 작가는 그 누구도 타인을 기만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같은 펄떡이는 말로, 리본처럼 꼬인 붉은 혀로,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가을이 오면」은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스물일곱의 못생긴 여자 ‘로라’가 주인공이다. 시장통의 옥탑방에서 자취를 하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자기와는 달리 언제나 우아한 어머니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우연히 지갑을 주워준 인연으로 만난 남자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예쁘지도 않은 자기한테 왜 ‘로라’라는 이름을 지었느냐고 어머니에게 따져묻는다. 어머니에게 그악스럽게 비난을 쏟아놓고, 남자에게마저 소리를 질러대어 결국 혼자 남겨진다. 자칫 괜한 반항으로 비칠 수 있는 주인공의 심리는 ‘알레르기’라는 질병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절박함으로 인해 진정성을 확보받고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약콩이 끓는 동안」에는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김교수와 그의 아들들, 김교수의 집을 드나들게 된 여자 대학원생 ‘윤양’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의 욕망을 드러낼 뿐 제대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이를테면 김교수는 윤양의 사소한 실수를 문제삼아 벌컥 화를 내고, 김교수의 아들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윤양에게 객쩍은 수작을 부리는 식이다. 소설의 첫부분에서 모호하게 드러났던 윤양의 상황은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지는데, 그녀 역시 김교수처럼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차에 치여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는 순간 김교수네 가정부 목소리의 환청을 듣는다. 실험적인 기법 속에서 고립된 인간의 모습이 교묘하게 직조되어 있는 이 소설에는 건조한 유머가 돋보인다. 또한 가정부 여자의 눙치는 듯한 말투, 그리고 그녀가 끓이는 ‘약콩’에는 이 모든 아이러니를 포용하는 긍정의 시선이 담겨 있다.

 

「솔숲 사이로」는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산에 왔다가 그대로 ‘솔향기’라는 공동체에 눌러앉게 된 ‘그’와, 점점 ‘그’의 매력에 빠져드는 솔향기 식구들의 이야기이다. 솔향기 식구들은 모두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주변인들로, 권여선 고유의 캐릭터를 이어받아 변주하고 있다. 말수가 적고 재능이 뛰어나 무엇이나 잘 해내던 ‘그’는 신비로운 면모를 지닌 채 ‘솔향기’를 떠나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빈자리를 메우며 서로의 슬픔을 다독인다.

 

「반죽의 형상」에서 ‘나’는 대학 사년과 회사생활 사년을 함께한 친구 N과의 관계를 지속해나가기 어렵다고 느끼는 인물이다. 이제는 N은 내게 무심하고 나는 N을 경멸하는 상태다. N과 나는 대학시절 내내 지나치게 붙어다녔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부터 서로 만나는 일을 줄인다. 우정-사랑이 실패로 남은 그때 이후로 N은 거식증을, ‘나’는 대식증을 앓게 된다. “한덩어리의 반죽으로 두 형상을 빚을 때 하나의 형상을 작게 만들면 다른 형상이 커지듯 N의 거식증이 심해질수록 내 대식증도 심해졌다.” 식이장애를 겪는 ‘나’, 예전에 받은 모욕을 잊지 않고 모욕의 깨끗한 변제인 결투를 꿈꾸는 ‘나’는 고통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대응방식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알레르기로 고통받고 상대방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로라와 닮았다.

 

<P align=justify /> 『분홍 리본의 시절』은 평론가 김영찬이 말하듯 “너나없이 질병을 나누어 안고 살아가는 인간존재의 비루한 실상을 헤집어놓는 작가의 냉연한 시선”이 돋보이며 “동정이나 연민 같은 착한 정념의 필터가 제거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성을 확보했다.(해설 「괴물의 윤리」)

 

<P align=justify />건조한 문체로 거침없는 자기해부를 보여주고, 대화와 생략 사이에서 독자로 하여금 적극적인 독법을 이끌어내는 『분홍 리본의 시절』은, 곳곳에서 감상적이지 않은 날카로운 시선과 삶의 악조건을 이겨내려는 분투를 보여준다. 권여선의 소설은 “애정이라든가 연민을 갖지 않은 눈에는 보이지 않을, 후미진 곳, 혹은 사각지대에 분홍빛을, 푸른빛을 비추고 있다”(공선옥의 추천사).

목차

가을이 오면
분홍 리본의 시절
약콩이 끓는 동안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

해설_김영찬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수상정보
저자 소개
  • 권여선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있다.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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