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책 소개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사람이기에 해야 하는 말, 세상의 독촉과 맞서는 시인 백무산의 신작 시집

 

 

한국 노동시를 대표하는 백무산 시인의 신작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가 출간되었다백석문학상 수상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열번째 시집이다. 1984년 무크지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해왔던 시인은 그동안 끊임없는 시적 갱신과 변모를 거쳐 노동시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최근 10여년간에 펴낸 세권의 시집(『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이 모두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았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동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는 웅숭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친다치열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과 시대상을 침통한 눈으로 응시하는 고백록(고영직해설)과도 같은 묵직한 시편들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나 생태 문제 등으로 시 세계의 폭을 넓혀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시간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전복적 사고를 보여준다시인은 혁명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정지의 힘을 예찬하면서 이 정지의 힘이야말로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정지의 힘」)를 찾는 길이라고 역설한다이는 삶의 과정은 없고 오로지 목표만 존재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감각, ‘인간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길이다그것은 또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건 완성된 것에서 시작되어 카운트다운될 뿐(「카운트다운」)자본의 폭력에 얽매여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이식하고 교환하고 대신(「교환가치」)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진 삶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수록 시인은 풍경을 풍경으로 이해했던(「감각의 기억」) ‘저 너머의 세계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친다그렇다고 지금여기의 현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고 개소리하지 말라는 이 한심한 시절(「겨울비」)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허울뿐인 민주주의는 질척질척하고 가진 자들은 야비하고/권력은 추악(「사막의 소년 병사」)한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누군가의 작은 기쁨을 위해/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잔혹한 일상(「평범한 일상」)에서 과연 무엇이 인간적인 삶인지 되묻고여전히 버려지고 쓰레기가 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비참한 삶을 냉엄하게 바라본다.

 

우리 사회가 오래전에 낡은 체제를 혁명하고/또 혁명에 혁명을 거듭(「히말라야에서」)하여 많은 진보를 이루긴 했으나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고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 또한 변함없다힘 있는 자들이 오히려 작고 바닥을 기고 발톱도 없는” 힘없는 자들의 저항의 공간인 광장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가 하면심지어 약자의 울분을 모방한 자들이/광장을 먹고 튀(「광장이 사라졌다」)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그러나 시인은 좌절하지 않는다.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이 열(「재앙의 환대」)린다는 믿음이 있기에 비록 실패의 기록일지라도 세상을 바꾸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이렇듯 삶에 밀착되어 다가올 시대를 예감하는 백무산의 시는 현란하고 뒤틀린 언어들을 비집고 나오는 사람의 말(신철규추천사)이다그렇기에 그의 시는 늘 우리 곁에서 희망의 노래로 빛날 것이다.

추천사
  • 유독 백무산의 시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명치끝이 무거워지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인간(노동자)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가진 자들’은 더러운 것, 추한 것, 낡은 것의 처리를, 그 위험을 ‘인간성’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자들’에게 떠넘기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겨울비」)에 우리는 이제 다 ‘민주화’되었으니 그냥 휩쓸려가거나 눈감아버리면 그만인가. 그는 ‘차가운 신발’을 신고 물기 없는 슬픔으로 가득한 ‘부서진 얼굴’로 길 위에 멈춰 서 있다. “감사와 참회”마저 “낡아빠진 문화”(「히말라야에서」)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이제는 안주하라는 세상의 독촉에 맞서,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잔혹한 일상’이라고 말하는 것. ‘버러지’를 만들어내야만 유지되는 세계에 맞서, 뒤틀린 고통들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 백무산의 시는 ‘현란하고 뒤틀린’ 언어들을 비집고 나오는 ‘사람의 말’이다. 사람의 말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며, 사람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말이다. 사람의 말을 잃어버린 사람을 우리는 더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신철규 시인

목차

1

외상 장부

회령

통일이 가로막아

이유

눈이 부셔

사막의 소년 병사

히말라야에서

늑대를 기다리는 시간

기억의 주형

축의 시간

인간 형성

오 프로

교차 신호등

인월장에서

 

2

잘 가셨는지요

무무소유

조문

세워진 길

그때가 좋았지

수의

과잉 풍경

소를 끌고

겨울비

무게

그들 등쌀에

모과

차가운 신발

변명

정지의 힘

 

3

평범한 일상

공유지

몸의 명상

버러지 만들기

봄날에 꽃을 들고

사람의 말

감각의 기억

재앙의 환대

카운트다운

나에게 이르는 길

내가 어디까지인지

미각 권력

밥이 끓는 동안

 

4

새의 운명

사랑 혹은 불가능

풀의 바다

안락사

시계

드론

광장이 사라졌다

지구평면설

교환가치

리바이어던

누구였을까

외계인

도마

설산의 바람

 

해설|고영직

시인의 말

수상정보
  • 백석문학상
저자 소개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열번째 시집이다. 여전히 나는 첫 시집을 내던 그곳과 다름없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나 자신이 하나의 관측소인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있는 곳은 변방이다. 거의 모든 것의 변방이다. 변방은 얼마간 야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찌꺼기가 훨씬 더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래서 시가 나에게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억압된 현실을 마주해서 찌꺼기들을 재료로 무슨 연금술이라도 부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빛나는 무엇이 아니라, 금을 똥으로 만드는 뒤집힌 연금술이기도 했다.
그제는 오래간만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마을에 가보았다. 공단에 둘러싸인 바닷가다. 볕에 그을린 젊은 노동자 하나가 화물선에서 막 내려서고 있었다. 봄볕 가득한 바다에는 외항선 몇척이 떠 있었다.

2020년 3월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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