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을 적시며

책 소개

아버지가 일군 질박한 흙의 시

 

 

전통적 서정과 강원도의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두고 시대현실과 기울어가는 농촌공동체의 아픔과 슬픔을 담백한 어조로 노래해온 이상국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 』가 출간되었다.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들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나온 삶을 노래하는 이상국의 시는 애잔한 감정을 자아낸다.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한”(「그늘」) 삶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했던 시인의 꿈은 심상한 좌절을 맞는다.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먼 배후」)이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상강(霜降)」)다는 자조에 이르는 데서는 짐짓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인은 마냥 서러움에 주저앉지 않고 “매일 얼어붙은 강을 내다보며”(「언 강을 내다보며」) 아직 누군가를 기다린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산그늘」 전문)

 

 

이상국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나 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바다’보다는 주로 ‘땅’을 소재로 삼고 ‘흙’의 언어를 부리는 농경적 정서에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혜화역 4번 출구」)임을 자임하며, “붉은 메밀 대궁”에서 “흙의 피”를 떠올리고 “달밤에 깨를 터는”(「옥상의 가을」) 어머니를 연상하는 전형적인 농사꾼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햇빛 속으로 달아난다/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흙의 피가 들어 있다/피는 따뜻하다/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세상의 모든 옥상은/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어머니 같았으면 벌써/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옥상의 가을」 전문)

 

 

이번 시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국수(「국수 공양」 「폭설」), 장떡(「뿔을 적시며」), 라면(「라면 먹는 저녁」), 감자밥(「감자밥」), 모두부(「참 쓸쓸한 봄날」), 닭백숙(「조껍데기술을 마시다」) 등 음식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다. 이러한 시편들은 우리 시사(詩史)에서 음식을 시의 소재로 즐겨 삼은 대표적 시인인 백석의 아취(雅趣)를 물씬 풍긴다. 1999년 시인이 수상했던 제1회 백석문학상의 영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시인은 불교 용어 ‘공양’을 통해 먹는 일의 성스러움과 음식의 귀함을 새삼 환기한다. 그는 이천원짜리 국수 한그릇에서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국수 공양」) 기운을 얻고, 인간세의 도반의식을 깨친다.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이천원을 시주하고 한그릇의 국수 공양(供養)을 받았다/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숫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그러나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 것이다/오늘밤에도 어딘가 가야 하는 거리의 도반(道伴)들이/더운 김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국수 공양」 전문)

 

 

모진 세상살이의 정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도 그러하거니와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관조하는 시인의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다. 물떼새가 해안선을 따라가며 외다리로 종종걸음 치는 모습이 “마치 지구가 새 한마리를 업고 가는 것 같았다”(「다리를 위한 변명」)는 구절이나, “나뭇가지에 몸을 찢기며 떠오른 달”(「한천(寒天)」), 겨울날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시뻘건 손”(「매화 생각」),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소나무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함성처럼 흔들린다”(「소나무숲에는」)와 같은 시구(詩句)에서 보듯 시인의 섬세한 손끝에서 가슴 시린 절경이 고요히 태어난다.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그래서 잎잎이 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봄에 겨우 만났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 뚝뚝 흘리며//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단풍」 전문)

 

 

이상국의 시는 ‘살림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다. “사는 게 팍팍”(「집에 가고 싶다」)하고 각박한 ‘살림의 공간’에서 “어떻든 살아보려고 애쓰는”(「골목 사람들」)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애틋하다. 시인은 “바지 밖에서 잠든 노숙자의 다리들”을 보며 “무릎 밑이 다 서늘해”(「다리를 위한 변명」)지는 삶의 비애를 느끼고, “붕어빵을 사들고 얼어붙은 골목길을 걸어/집으로 가는 아버지들”(「매화 생각」)에게 연민과 애정의 손길을 뻗는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상실해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 관하여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시가 풍기는 강건함과 질박함, 시적 기교나 수사를 뛰어넘는 진솔함은 여기에서 우러나온다. 리얼리즘의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서정으로 삶의 깊이를 담아내는 그의 시를 대하면 “섭섭하고 외롭고 썰렁한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도종환 「추천사」)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한겨울에 뿌리를 얼려/조금씩 아주 조금씩/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바위도/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몸을 내주었던 것이다/치열한 삶이다/아름다운 생이다/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틈(「틈」 전문)
목차

제1부
옥상의 가을
용량(容量)
언 강을 내다보며
국수 공양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집에 가고 싶다
내 이름은 문학의 밤
아들과 함께 보낸 여름 한 철
다리를 위한 변명
뿔을 적시며
그늘
마음에게

제2부
고독이 거기서
원통(元通)
라면 먹는 저녁
가방 멘 사람
느티나무 아래서
우두커니
밥상을 버리며
감자밥
형수
어린 가을
폭설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산그늘

제3부
그도 저녁이면
참 쓸쓸한 봄날
흰 웃음소리
열반
단풍
먼 배후
상강(霜降)
조껍데기술을 마시다
한천(寒天)
겨울 백담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비를 기다리며

제4부
바람 부는 날
미시령 하이에나
큰일이다
아내와 부적
포장마차
화근(禍根)을 두고오다
저녁 술
보일러 망가졌다
고래 아버지
신발에 대하여
혜화역 4번 출구
정든 민박집에서

제5부
싸마르칸트

매화 생각
한계령 자작나무들이 하는 말
도라산역에서
가을 온정리 가서
신검을 받다
우리나라 백일장
면사무소
세탁소에서
골목 사람들
전군
달려라 도둑
소나무숲에는

발문|이홍섭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상국

    1946년 강원도 양양의 농촌에서 태어나 책보를 어깨에 둘러메고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려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1976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심상』을 통해 시인이 된 후 첫 시집 『동해별곡』에 이어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등 일곱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시인의 꿈을 이룬 지금은 땅콩 방만 한 산속의 오두막에서 사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첫 동시집 『땅콩은 방이 두 개다』에는 어린 벗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와 반달곰, 기러기 등 자연의 친구들과 같이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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