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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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세계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시적 예감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일궈온 이장욱 시인의 세번째 시집 『생년월일』이 출간되었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세련된 특유의 감수성을 선보이며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실재를 서늘한 눈빛으로 꿰뚫어본다. 전통 서정시의 외형을 허물고 재래의 익숙한 서정과 정형화된 시의 문법을 비트는 파격이 색다른 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미묘한 서정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장욱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사뭇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감각적인 이미지 묘사는 박진감이 넘친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시인은 “근육질의 눈송이들”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듣고, “점 점 점 떨어”지는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을 예감한다.

 

 

넌 누구냐?/가까워서 안 보여//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근육질의 눈송이들/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너는 너무 가까워서/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점 점 점 떨어질수록/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우리의 머리 위에 정교하게 도착한다는 것(「겨울의 원근법」 부분)

시인의 예감은 현실이 되어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하다가 “계란의 속도로 부서”진 후 “뜨거운 이야기”(「겨울의 원근법」)로 번져간다.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고요한 세상’의 해체(『내 잠 속의 모래산』)와 ‘자아의 실종’(『정오의 희망곡』)에 골몰했던 시인이 이제 “입을 벌리는 순간/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나고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수평선은 생후 십이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십이년 전의 그날이 먼 후일의 그날이다가,/수평선이다가,/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 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생년월일」 전문)

축복받아 마땅한 ‘생일’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시인에게 세계는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고 “자꾸 무너지면서 또/발생하는” “등뒤의 세계”(「뒤」)이다. “신호등이 지배하는”(「세계의 끝」) 이 세계에서 시인은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동사무소에 가자」)나 “모퉁이를 돌면 남자의 성기가 나타나고/아무리 걸어가도 큰길은 나오지 않”고 “운구차가 영영 들어오지 못하는”(「재크의 골목」) 골목, “지진에만 반응”(「특성 없는 남자」)하는 횡단보도 등과 같은 일상의 후미진 구석을 떠다닌다.

 

 

동사무소에 가자/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외로울 때는/동사무소에 가자/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떠나지 못한 곳//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짧은 질문을 던지지/동사무소란/무엇인가//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동사무소에 가자//(…)//동사무소는 간결해/시작과 끝이 명료해/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왼손을 들고/왼발을 들고(「동사무소에 가자」 부분)

일상이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생일’을 지속하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함돈균 「해설」)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생일’은 태어남에 관한 것인 동시에, 일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생년월일’에 관한 “모든 것이 있는 곳”, “시작과 끝이 명료”하고 “간결한 곳”,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는 더이상 예측 불가능한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일상의 공간이다. 이 빈틈없는 일상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문. “질문이 없는” 세계, “의심”하지 않는 이곳은 세계의 끝이다. 그리고 일체의 질문이 소거된 세계의 끝에서 문득 “동사무소란/무엇인가”라는 세계 형식 자체를 문제 삼는 최후의 질문이 출현하는 순간, 세계의 모순은 드러나고야 만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개체들의 ‘탄생’과 개체들이 모여 이룬 세계의 ‘지속’과 그것이 곧 ‘끝’이 되는 세계 풍경의 묵시적 묘사이기도 하다.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그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반드시 그 순서로/당신은 말한다//당신은 사차선 도로를 건너가는 개에 대해/싸이즈가 맞지 않는 외투에 대해/카드놀이의 불운에 대해/조금씩 넘친다//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춤을 추며 우리 앞에 나타나듯/당신은 말하는 법이니까//뒤꿈치를 들고 걷다가도/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도/생일 다음에는 불안,//(…)//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당신이 말하는 순서」 부분)

이장욱은 현재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이면서 소설가, 비평가, 연구자로서도 자신만의 입지를 굳힌 보기 드문 전방위 작가이다. 일찍이 평론가 신형철은 이장욱을 두고 “뭐랄까, 그는 그냥 ‘문학’이다.”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의 시세계는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자아의 탈인칭화에 이어 세계의 탄생과 끝을 탐색하는 완숙한 경지에 올라섰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전위적’이다. 낯익은 서정의 극한을 과감히 확장하는 그의 시적 세계는 섣불리 읽어서는 쉽게 해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정시의 ‘내파’와 ‘갱신’을 추구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그의 시는 분명 독자로 하여금 진부한 감동을 갱신하게 만드는 미묘한 힘이 있다.

 

 

혀끝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짐승들/불안을 생산하는 물고기들/비 내리는 식물들//나는 동정받고 싶지도 않고/이런 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일종의/일종의/라고 중얼거리는 시간//오늘밤과 모든 밤들의 사이/식사시간이 도래했다/내 입은 아와 어 사이에 있고/내 입은 늘 유일한 모양이고//이것은 마침내 피 묻은 시간/모든 미래로부터 솟아나온/단 하나의 순간//생각에 잠긴 세포들/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전자들/계문강목/과속종들//나는 지금 나의 내장을 다 뒤져도 발견할 수 없는/나는 지금 내 혀끝에 남아서 감미로운/다시 비 내리는/뜨거운//일종의 밤/아주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선혈이 낭자한/일종의(「일종의 밤」 전문)
목차

제1부
반대말들
일종의 밤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드라마
코인로커
피사체
동행
흘러넘치다
돌이킬 수 없는
동사무소에 가자
평균치
우울하고 감상적인 삼단논법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른손은 모르게

제2부
당신이 말하는 순서
장화 신은 고양이
특성 없는 남자
생년월일
다섯시에서 일곱시까지의 끌레오
핀란드
재크의 골목
수요일의 인사

목격자들
뼈가 있는 자화상
겨울의 원근법
혈연의 밤

제3부
의자
물고기 연습
인형들
토이 스토리
죽은 L
나의 미완성 연인
기념일
간발의 차이
밤의 연약한 재료들
전속력
우연을 위한 장소
그라운드
피의 종류

제4부

구름의 소비자
스위치
점성술이 없는 밤
아르헨티나의 태양
세계의 끝
소규모 인생 계획
만일의 세계
얼음 속에서
식물의 표정으로
겨울에 대한 질문
토르소
관절의 힘

해설| 함돈균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장욱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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