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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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고독 속에서 사유하는 실존, 그리고 금기의 대륙

 

 

 

강건한 문장으로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역사와 시대를 다루어온 정철훈의 네번째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출간되었다.

 

특유의 선굵은 어법이 여전히 빛을 발하는 가운데 시인은 한층 깊어지고 넓어진 관조의 시선으로 삶의 비애를 이야기한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내야하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고독은 그의 시가 빚어지는 출발점이다.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 밤에는 글 쓰는 고독한 작가 / (…) // 보험회사 직원이 2라면 작가가 8일 거라는 생각 / 밥벌이와 영혼의 관철이 2대 8일 거라는 / 생각의 연장이 카프카의 사진이다(「카프카의 가르마」 부분)

 

 

이렇게 일상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시인의 사유를 거치며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으로 승화한다. 시인은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존재 자체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고 그 근원을 탐구한다. 그에게 고독은 개인의 실존을 담보하는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이다.

 

 

어느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 실내와 실외를 구분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 커피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 (…) // 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에 / 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 / 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보는 것이다 (「누에의 꿈」 부분)

 

 

그럼에도 시인은 모든 이들에게 팍팍한 일상과 정체불명의 외로움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대한 허탈감 역시 감추지 않는다. “우리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대”를 뜨겁게 거쳐온 그에게 “이미 좌절된 무력함의 시대”에 “아직 이루지 못한 미몽”(「나의 시대」)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분명 힘에 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직해지자 / 우리에게 식탁이나 밥상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 봄이 올 때까지 이 겨울의 사랑을 어찌 껴안을까 / 몸은 더운데 사랑의 바닥은 차갑구나 / 사랑아,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를 기다리자꾸나 / 그리고 기억하자 / 이 지난한 방 한 칸의 사랑을(「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부분)

 

 

이전에 발표한 시집과 소설을 통해 알려져 있다시피 시인은 큰아버지가 월북하는 등 남다른 가족사를 지닌데다 러시아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한 이력을 가지기도 했다. 이것은 시인이 시적 사유를 펼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날이 밝으면 큰아버지가 공항에 도착하는 아침이다 / 그는 오래전 소련으로 망명했으니 그 국가가 패망해 사라졌다 해도 그는 소련에서 온 사람이다 // (…) // 나는 진정 그가 이국땅에서 운명하길 바란다 / 내 피에도 불귀의 유전자가 흐른다는 걸 그가 증명해주길 / 이 시대에 고향에 뼈를 묻는 일은 사치에 가깝다(「로맹 가리를 읽는 밤」 부분)

 

 

근원적 고독 아래에서 실존하는 인간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렇듯 한 국가의 틀에 갇힐 수 없었던 자신의 삶 속에서 다듬어져온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시인은 한국을 벗어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시집 곳곳에 새긴다.

 

 

수신자 없는 편지를 쓰는 밤은 늘어가고 / 아무도 읽지 못할 일기를 끼적일 펜과 잉크는 얼어붙고 있다 // 자작나무 가지가 눈을 이기지 못해 우두둑 부러질 때 나는 눈을 뜬다 // 비행기는 시간여행을 하는 한 마리 날벌레처럼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가고 / 나는 어디로도 귀환하고 싶지 않았다(「흑승」 부분)

 

 

“공화국은 너무 크고 무슨무슨 동은 너무 작”(「도화동 언덕길」)다며 “나는 국가와 격리되어야 한다”(「흐느낌의 은어(隱語)」)고 토로하는 시인이 인간존재와 시대를 사유하는 공간적 배경은 그래서 매인 데 없이 펼쳐진 저 북방의 벌판이다. 해설을 쓴 평론가 홍용희는 1930년대 오장환 시인이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고 노래했던 「The Last Train」의 정서와 이념을 정철훈이 재건하고 있다고 평한다. 분단 이후 우리 시사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북방의식’을 되살리는 시사(詩史)적 의미가 정철훈 시에 있다는 것이다.

 

 

이동휘 홍범도 박진순 김아파나시 홍도 김규식 여운형 / 이 역을 지나 뻬쩨르부르그에 당도했을 이름들 / 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린 1920년 / 피압박이라는 단어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녹냄새가 난다 // (…) // 외로운 급수탑 하나가 모든 이야기의 중심으로 서 있던 / 해 지기 십분 전 / 열차는 식당칸의 접시들을 달그락거리며 미끄러져갔다(「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부분)

 

 

광대한 대륙의 풍광 속에서 구현되는 이러한 북방의식은 개인의 실존적 고독, 그리고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시대에 대한 의식과 결합해 인간의 고독과 방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그의 시에 생생하게 구현되는 이국적 이미지 속에서 사람들은 국경과 민족에 상관없이 힘겹게 오늘을 살아낸다.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는 일가족 / 그들을 데려가는 것은 기차 바퀴가 아니라 / 차창을 스치는 바람과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묵과 / 그 사이에서 일렁이는 슬픔이라 생각되던 것인데 // (…) // 차가운 쇳조각으로서의 철길이 / 가족의 시선 안에서 출렁이는 눈물처럼 / 마디마디 끊어진다 한들 / 삶은 확실히 슬픔과 중력의 자식일 것이니 / 기차가 슬픔을 가로질러가듯 / 이 모든 것 너머에 우리는 존재한다(「감자를 벗겨 먹는 네 개의 입」 부분)

 

 

그리하여 인간의 생이란 “완전한 혼자이고 싶은 나”(「뼈아픈 오후」)의 고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존재를 적시는 빗줄기”(「비를 맞으며」)와도 같은 사랑을 떠올리고, 헐리는 종로 피맛골이 아쉬워 찾은 빈대떡집에서 “근대화”와 “껌파는 노파”(「어떤 흐느낌도 멈춘 정지의 한때」)에 골똘해지는 시적 경험은 때로 우리에게도 찾아온다. 정철훈의 시는 고독도 사랑도 시대도 역사도 그렇게 우리 안에서 보편의 이름을 얻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의 시를 읽으며 사유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시인이 책장 너머 우리 앞에 놓인 그 무언가를 진지하게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목차

제1부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카프카의 가르마
로맹 가리를 읽는 밤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
나의 시대
여치 소리
막차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
러시안 블루
비를 맞으며
오누이
이도백하(二道白河)
어떤 마중
흑승

제2부
왕오천축국전을 읽는 아침
누에의 꿈
이별 즈음
흐느낌의 은어(隱語)
도화동 언덕길
겸허한 닭백숙
횡단보도 앞에서
기러기의 역설
딸에 대하여
유모차가 있는 풍경
하여간
개망초
저녁 먹고 한 바퀴
합승

제3부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흐린 날의 풍경
키스라는 물건
문밖의 남자
내 하나의 서부전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풀밭 위의 식사
희미하지만 황홀한
어떤 산행
어느 가을날
어떤 흐느낌도 멈춘 정지의 한때
추석 전야
고적한 설거지
구정의 상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제4부
은유적 반성
자정에 일어나 앉으며
감자를 벗겨 먹는 네 개의 입
문짝

플랫폼에서
만리동 언덕길
향산호텔에서 밥이 넘어가지 않던 이유
문상
뼈아픈 오후
마지막 삼종(三鍾)
네 개의 주어로 남은 사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당신
두만강변 북한 수비병에게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롤랑 바르뜨의 어묵

해설│홍용희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정철훈

    1959년 광주 출생. 전 국민일보 문학전문기자·논설위원.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모든 복은 소년에게』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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