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두운 저편

책 소개

신성한 어둠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한 사랑의 노래

 

 

 

시와 평론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남진우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사랑의 어두운 저편』이 출간되었다. 신성과 신비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않는 순례자로서 시인은 멀고 어둡고 아련한 것들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죽음과 고독의 색채가 짙게 드리운 상징과 이미지의 매혹 속에서, ‘당신’을 향한 그의 나직한 연가가 부드럽고 아득하다.

 

그만큼 일관되게 세계 저편의 신성을 호출해오는 일에 매진하는 시인도 없다. 그는 신성이 불가능한 이 불행한 시대에 그 불가능성을 노래함으로써 신성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인이다. 그 막막한 길에서 한없는 비애를 불러일으키며 시인을 매혹한 여러 상징과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짙게 드리운 죽음의 색채, 활활 타오르는 불길, 모래바람 가득한 사막, 어디선가 불쑥 나를 찾아오는 동물들,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들. 시인만의 상징들이라 부르기에 이미 충분한 그것들은 늘 끊임없이 너울거리며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갔다 다시 이곳에 내려놓곤 한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집 전반부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달의 상징이다. 밤-죽음의 텅 빈 구멍인 달 자체는 남진우 시에서 생경한 대상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훨씬 다양하게 변주된다. 달은 자주 모래와 사막과 어울려 황량한 죽음의 풍경을 이룬다: “달은 모래로 뒤덮여 있어 / (…) / 여기저기 흩어진 모래무덤에서 / 희디흰 뼈들이 빛을 뿜어내고 있어”(「달의 어두운 저편」).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달은 멀리서, 저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는 통로로서 빛난다.

 

 

 

어느날 나는 / 달이 / 밤하늘에 뚫린 작은 벌레구멍이라고 생각했다 // 그 구멍으로 / 몸 잃은 영혼들이 빛을 보고 몰려드는 날벌레처럼 날아가 /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 (…) 비좁은 그 틈을 지나 / 광막한 저 세상으로 날아간 영혼은 / 무엇을 보게 될까 // 깊은 밤 귀기울이면 / 사각사각 / 달벌레들이 밤하늘의 구멍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린다(「달이 나를 기다린다」 부분)

 

 

 

그렇게 달을 통해 저 세상으로 날아간 영혼들이 보는 것은 꼭 어두운 죽음만은 아닐 것이다. 달에서는 또한 “내가 잃어버린 숱한 꿈들”인 “황금물고기들”이 쏟아져나와 “찬란하게” “밤새도록 내 잠을 환히 밝히며” “온 방 안을 떼지어다니”기 때문이다(「황금물고기」). 혼자가 아니라 ‘당신’이 곁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달에는 참 많은 무지개들이 살고 있어 / 달빛 아래 서면 그대와 나 / 어느덧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다”(「달의 음악을 들어라」). 이럴 때 달은 성스러울 뿐 아니라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당신’이 시 안에 들어와 달은 충만해진다. 그런 당신은 대개 달만큼 ‘멀리’ 있다: “둥근 달 속엔 잠자는 당신이 비치고 / 지상엔 깨어 있는 그 홀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당신이 잠든 사이」) “꿈속에서 소년은 달의 바다 한가운데 서서 / 멀리 푸른 대지 위 사랑하는 소녀의 집을 바라본다”(「달의 연인들」). 그런 당신은 “멀리서 다가와 멀리 사라져버리는 / 무슨 아득한 종소리 같은 것”(「겨울새」)이다. 이는 남진우 시에서 익숙한 ‘죽음에의 초대’라기보다는 ‘사랑의 기척’이라 할 만하다. 물론 사랑과 죽음은 한몸이라고 우리는 머리로 익히 알고 있고, 시집 전체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여전히 음울하지만, 그의 시에서 사랑이 온전히 타나토스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시집들을 검고 붉게 적시던 시취와 피냄새가 이번에는 썩 줄어들어 있기도 하거니와, 죽음 혹은 상상적인 합일의 순간보다는 찬란한 황홀과 캄캄한 절망의 변증법을 노래하는 것이 『사랑의 어두운 저편』의 시들이기 때문이다. 그 황홀의 높이만큼이나 사랑은 확고하고, 그 절망의 깊이만큼이나 사랑은 불가능하며, 그러니 그 낙차만큼이나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는 가없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서 시인=순례자가 떠나는 길은 곧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한 끝없는 여정으로 그려진다.

 

 

 

해 지는 서역을 향해 걸었습니다 / 흙먼지 자욱이 이는 길 /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 / 아무리 걸어도 설산은 가까워지지 않고 / 길가 유곽에서 흘러나온 작부들의 낭자한 노랫가락만 / 처마 밑에 내걸린 빛바랜 연등을 바스러뜨리며 퍼져나갔습니다 / 좀먹은 경전 펼쳐들어도 고원을 지나 내가 가야 할 길은 한이 없고 / 문득 꽃향기가 난다 싶어 고개를 들면 아득한 벼랑이었습니다(「비단길」 부분)

 

 

 

모든 빼어난 시가 그렇듯, 이 시 또한 시인의 운명론이자 시론이기도 하다. 구원이 불가능한 시대에 당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설산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은 한이 없고, 그래도 시인은 그곳을 향해 걷기를 멈출 수 없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꽃향기와 벼랑 사이, “유혹의 가장 높은 음과 절망의 가장 낮은 음의 대위법”이 야기하는 “현기증”(권희철, 「해설」)이 바로 그의 시이다. 그렇다면 신성함의 근원은 ‘서역’이 아니라 ‘비단길’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신성에 이르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그 끊임없는 불가능함이 신성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이 순례자의 행보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처음 마음이었고, 오랜 고난을 통과해가는 여정의 여일한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걸어간다. 숭고한 불꽃에 취하고, 죽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무시로 낯선 짐승들의 내방을 받아온 시인은 결국 그 숱한 상징들이 명멸하는 사막을 오직 운명처럼 가만히 견디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간 것이고,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소식을 전하는 이 시집은 신성을 향해 끝없는 길을 떠난 순례자가 깊은 밤 당신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깊고 묵묵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 입 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 입 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 / 아름다운 동그란 불꽃 하나 만들어 /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 아무리 속삭여도 /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고백」 전문)

목차

제1부
고백
꿀벌치기의 노래
달의 어두운 저편
당신이 잠든 사이
달이 나를 기다린다
검은 달
夜想曲
마당에 장미가 만발하리라
너를 생각하며
달은 고양이처럼
초대
새알찾기
블루 문
카프카
황금물고기
기다림
달의 음악을 들어라
달무리 지는 마을
시월의 시
달의 연인들
지상의 양식

제2부

종소리
비단길
밤의 연안
白石
밤, 짐승들이 다가오고 있다
적막
폐선에 기대어
까마귀의 書
기찻길 옆 오막살이

생일
개도둑
겨울 저녁
새벽, 한낮, 해질녘
초원에서
잠자는 숲속의 곰
토끼에 대한 보고서
술래잡기
별똥별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해으름
사냥꾼의 밤
요리사의 책상

제3부

흰상어와 검은표범의 사랑 이야기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운 시냇가
빈방
겨울새
추운 나라에서 온 시인
봄비
빈혈
강가에서
점치는 여인
누가 쇠북을 울리는지
휘파람새
짐승의 시간
달이 사라진 사흘 동안
그대에게 가까이
달을 쏘다
꽃게의 시절
외출
순례자의 잠
모닥불 앞에서
화살에 부친다
페르마타
나 죽은 후

해설│권희철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남진우

    南眞祐 196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가 있으며, 김달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0 reviews
리뷰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