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일상

책 소개

치욕의 현실에 던지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저항의 목소리

노동문학의 중심을 형성하며 끊임없는 갱신과 깊이를 획득하여 민중시의 가능성을 열어왔던 백무산의 일곱번째 시집 『거대한 일상』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1984년 무크지 『민중시』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만국의 노동자여』(1988)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 『인간의 시간』(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1999) 『초심』(2003) 『길 밖의 길』(2004) 등의 시집을 출간했고 만해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변치 않는 ‘노동자 시인’의 상징으로 불려온 그의 발자취는 점점 또렷하고 깊어졌을지언정 한번도 흐트러지거나 곁길로 새지 않았다. 아귀 같은 자본의 무한 잡식성에 대한 비판, 자본의 가치를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천착한 선 굵은 시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노동문학이 그 기치를 내리고 슬며시 다른 깃발을 올릴 적에도 줄곧 우리가 처한 현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진지하게 인간과 노동을 탐구해왔다. 그의 시세계는 『인간의 시간』을 분기점으로 변화하는데 단순히 비참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것에서 인간을 둘러싼 삶의 조건으로서 정치와 경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으로 넓고 깊게 진화해왔다. 극단적인 자본주의체제가 야기한 인간성 파탄과 자연의 붕괴라는 현대세계의 위기를 감성적이면서도 강한 어법으로 노래한다.

이번 시집 『거대한 일상』 역시 백무산다움을 잃지 않고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살아 꿈틀대는 비유, 힘 넘치는 사유를 펼쳐 보인다. 또 한편에선 생태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잔잔하고 깊은 사유를 통해 시적 완성도를 견인한다.(「새만금에서」 「새만금 사각 바퀴」 「돌아오지 않는 길」 등) 다채로워진 여러 시세계 중에서도 단연 압권인 것은 치욕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일상을 직시하고 노동의 현실을 새롭게 각성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담은 시들이다. 고발에서 고백으로의 변화가 어쩌면 그의 시가 가닿은 지점일지 모른다. 그 고백은 더러 암울한 색조를 띤다. 그러나 아무리 어둡고 침침하더라도 그 인식의 칼날, 그 정서의 진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날카롭고 역동적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오래된 그 절/나와는 금생 인연이 딱 한 발짝 모자라/어떨 땐 눈뜨고 일없이 차를 놓쳤고/어떨 땐 차를 타고도 폭설에 갇혀 못 간 그 절/남의 인연 하나 억지 빌려 겨우 닿았을 때/절은 이미 한 발짝 앞에서 불길 속으로/훌훌 벗고 떠나가고 없었네/재로 지은 절 한 채 벗어두고//아쉬워할 건 뭔가,/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덜컹,/밖이 나오네//서러워할 건 뭔가,/본래 자리에 돌려주어//산에 청산에 가득한/재로 지은 절//그 절 만나고 오는 길/눈이 밝아져/돌부리에 걸려넘어졌네/재로 된 돌부리였네 ―「재로 지은 집」 전문

 

 

선(禪)적인 정서를 빌려 노래하는 잔잔한 시를 맛볼 때에도, 우리는 저절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꺼내든 채 지금 우리 자신의 자리를 둘러보고 움직이게 된다. 때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쉽고 서러운’ 자리에, 아주 불편한 자리에 가 있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게 하고 듣게 함으로써 제자리에 가만히 안주할 수 없게 한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할인매장 계산대에서/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꿇렸다//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힘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사람은 맑스였고/희망 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이름을 더럽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어둠속으로 사라졌다/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기대와 기댈 곳」 전문

 

이 시에서 치욕의 칼날은 바로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의 목을 겨눈다. 평등과 참다운 노동을 열망한 지난 연대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비루한 기억으로 치부하고 지워버리고 점점 자본과 불평등과 차별의 일상에 익숙해진, 더럽혀진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향해 칼날은 서슬퍼렇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에서 “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로 넘어가는 아름답고도 깊은 통찰은 지금 백무산이 와닿은 지점의 일부분일 뿐이다. 잠든 의식에 죽비를 내려침으로써 새로운 의식을 가져다주는 매개가 시라면, 백무산의 노래는 비참한 현실의 재현(mimesis)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추동하는 모종의 힘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시인이 직조해낸 서정적인 세계가 아름다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분노와 치욕을 끓게 하는 것은 그 서정성의 배면에 엄혹한 현실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중 인화된 현실은 엄존하는 노동계급의 세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닮아 있다.

 

 

11월, 한무리의 학생들이/항의 데모하러 몰려간 곳은/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겨울비 들이치는 비닐천막/나가라 학교에서 나가달라/학업에 방해되니 나가달라 핏대 올리며/늙은 살가죽 같은 천막을 걷어내자/중년 여인들이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었다//좀 사는 집 아이들 한 달 용돈도 안될 돈 받자고/청소일 식당일 열 시간씩 하던 여자들/그 일도 더 할 수 없다 쫓겨난 여자들/그 등짝에 대고 물러가라 집에 가라 씨펄 아줌마 학교냐/이겨봐야 돌아올 건 고달픈 나날이지만/고달픔이라도 구워먹고 삶아먹어야지 뭘 먹고 사나/자식 또래 아이들에게 튀어나온 개씹을 도로 삼키느라/목젖에 벌겋게 불이 붙었다//5월, 한낮 한가로운 교정에/팔순 할머니가 찾아왔다/평생 아껴 모은 재산과 지하 셋방을 지고 왔다/겨울 냉골에 들러붙은 살가죽도 걷어왔다/행상일 청소일 식당일로 닳아빠진 뼛골도 챙겨왔다/아이들에게 드리라고/장학금으로 드리라고/시신도 드리라고/다 드리라고/저 높은 곳에 ― 「저 높은 곳에」전문

지난 연대에 사회현실과 노동현실에 대해 가장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고 온몸으로 항의하고 강렬하게 저항한 곳의 상징이 대학이었다면, 이 시에 드러난 상아탑의 현실은 참담한 아이러니를 그야말로 적나라한 알몸으로 드러나게 한다. 이 시에서 보이는 대학의 현실이 보편적인가 아닌가는 어리석은 질문일 것이다. 이 시의 묘사가 1, 2연과 3연의 대비를 통해 낯 뜨겁고 역겨운 현실을 가감없이 훌륭하게 보여준다는 설명도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씨펄’과 ‘개씹’이라는 육두문자는 고스란히 우리 내면을 향해 겨눠지고 물들게 할 뿐이다. 이처럼 두말이 필요없는, 발가벗겨진 현시대의 자화상들이 이 시집에는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독자들의 시선을 감금하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이른 아침 난데없이 꽃밭에 꽃이 흐드러진 건/내 탓이다./식전부터 앞뒤 다니며 쿵쿵거렸고/내 불면을 화풀이하느라 툴툴 바람을 울렸고/제 빛깔 다 머금기 전에/고요가 몸에 다 무르익기 전에/파르르 놀라 드러낸 건 꽃이 아니라 공포였다.//씨앗은 자신을 떠나 고요를 통과해야/자신을 불러낼 수 있기에,//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전문

이번 시집을 읽다보면 백무산은 대단히 지혜로운 시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과 노동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고요에 깊게 침잠해야 한다는 시간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한편, 계층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손짓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앙상한 선전선동을 통해 광장으로 내모는 노골적인 방법이 아니라 화면 밖 목소리를 통해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유추하게 하는 지극히 시적인 방법으로 오늘의 사회문제를 정치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비판은 곳곳에서 정제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날것인 채로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처해 있고 우리가 자처한 ‘치욕’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들이다/더이상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우리의 노동이 자주 그렇게 만들었다/만들어가고 있다, 또다른 치욕도 ― 「치욕」 부분

노동을 신성하지 않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라는 시인의 선언은 분명 시인 자신의 뼈아픈 반성과 야유와 참담함의 끝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70년대 ‘불도저’라는 별칭을 훈장처럼 여기고 이제는 권력을 쥔 자가 우리의 일상에 군림하는 현실에 대한, 그 현실을 창조한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 담긴 이 시의 메씨지는 그야말로 ‘치욕적’이라 할 만하다. 우리 삶의 ‘야만’과 ‘비열함’은 직접적으로, 날것으로 토로되는데도 울림이 큰 감동을 선사한다. 그 날것을 자꾸만 곱씹게 하고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저 치욕과의 대면이 이제 일상이 되리/그것이 우리의 즐거움도 되리/역사도 정치도 세계도 저항도 허공도 그 무엇도/일상 아닌 것 없는, 거대한 일상이 ― 「치욕」 부분

시인은 벌써 치욕과의 대면을 통해 다시 한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큰 시련의 시간이 밀려오고 있다!”는 ‘시인의 말’처럼 현실은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정교하게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다. 이 현실의 한가운데에 백무산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치욕의 일상이 저항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거대한 일상’ 속에서 그는 저항하고 버티며 서 있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다”라는 네루다의 말을 인용하며, 백무산의 시를 “노동자와 시인, 시인과 구도자, 그리고 구도자와 중생의 경계를 여여(如如)히 타넘음으로써 리얼리스트-비리얼리스트 시의 경지를 활연(豁然)히 보여준다”(‘추천사’)라고 평가하는 문학평론가 최원식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극악해지는 우리의 현실에서 백무산 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값지다 할 수 있다.

분명 백무산의 이번 시집은 좌초하거나 목소리에 힘을 잃거나 시적 완성도 획득에 실패하고 지지부진한 민중시와 노동시에 실망한 독자들과 문단에 던지는 강력하고 파괴력 있는 저항의 몸짓이 될 것이다. 판에 박힌 내면에 매몰된 시단과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향해 근래 들어 이만한 힘과 완성도를 지니고 시원하게 정신과 현실을 일깨워주는 시집이 있었던가. 백무산의 변화된 시가 선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감성적인 것과 뜨거운 메씨지는 바로 여기, 우리의 현실에 있다. 불편하고 역겹고 부끄러울지라도 우리가 백무산의 시를 새겨서 읽어야 할 이유 또한 고뇌 끝에 시인이 도달한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점에 있다.

목차

제1부
생의 다른 생
화장터에서
호미
종말론
재로 지은 집
새만금 사각 바퀴
백수의 왕
허기
기도
나도 넥타이 매고

졸음

제2부
모가지
구원
일월산에서
카이로스
염소
기대와 기댈 곳
운주사
복(福)
누군가를 밟고 있었다면
새만금에서
‘쏘다’가 정의다
난로

제3부
감은사지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길의 숲
사람들끼리만
생명의 이름으로
견디다
목련 신파
저지대
어디선가 본 것 같아
낄낄거렸다
떨이
새벽 종소리
눈 가는 아침

제4부
나도 그들처럼
월성 안강
가방 하나
저 높은 곳에
역전시장에 가면
가장자리에서
봄은
허망을 위해
누가 오시려고
몸살
레이꼬 미싱
돌아오지 않는 길

제5부
길과 꽃
오목한 사랑

다르게 피는 꽃
돛대도 아니 달고
금강산
철폐하는 것은 치유하는 것이다
그대 생각
위인전
그러고 떠난 그 아이
흐르는 집
순결한 분노
치욕

해설│김수이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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