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책 소개

절제된 절창으로 탄생한 문인수 시의 정수!

절제된 언어로 생의 궁벽한 자리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뽑아내 독자를 애잔한 감성의 세계로 이끄는 시인 문인수. 불혹을 넘긴 나이(41세)에 늦깎이로 데뷔한 이후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그가 『쉬!』(2006) 이후 2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 『배꼽』을 출간했다. 이번 시집에는 “버려진 식당의자를 소외된 존재와 연결시키는 비유적 상상력은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하되, 그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삶의 의미를 표출”하고, “평범과 비범 사이에서 적당한 긴장과 의미를 유지”하면서 “시인의 사유와 언어는 그 의미의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팽팽한 실감과 긴장을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7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식당의자」를 비롯해 총 59편의 시를 엄선해 실었다.

그의 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수다스러워지면서 의미전달이 앞서는 작금의 산문시와 차별되는 단아한 맛과 잔잔하고 깊은 여운을 지닌 시세계를 지향한다. 사람들은 문인수의 시에서 화려하고 현란한 감각으로 채색된 작품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그가 한 편 한 편의 작품 속에 그려 보이는 풍경에는 무시무시한 활극의 역동적인 힘에 버금가는 끌어당김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한적한 산중 폐가에서 사람의 짙은 향기를 맡게 해주는 빼어난 솜씨. 그간 시인 문인수가 선물해준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망각된 것에 탯줄이 이어져 있었으며, 그 지난 시간들은 쫄딱 망해버린 흔적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으며, 미래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시 속에서 화자와 대상이 서로 살을 섞고 상승해가면서, 어느 것이 먼저이며 누가 누구의 것인지를 갈라내지 않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그림자 이전의 무엇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당위를 찾지 않는다.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행위가 우리에게 기원과 역사에 관한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대상의 과거와 그것의 흔적에 촛점을 두어 좋았던 과거의 시절을 그리기보다 현상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해 비루한 삶에도 모종의 활력과 생기가 깃들여 있음을 잡아내려고 한다. 표제작인 「배꼽」이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 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배꼽」 전문

 

 

한때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울고 웃고 떠들며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해갔을 집, 야산에 버려진 삶의 거처에 한 사내가 들어와 사는 풍경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사람이 떠난 폐가는 생기를 잃고 버려지게 마련이다. 집이 생기를 간직하는 것은 사람이 머물고 있는 동안으로 한정된다. 사람 없는 집이 생기를 지니려면, 그곳에 살지 않더라도 누군가 끊임없이 다녀가야 한다. 어쩌면 이 시 속의 주인공 사내는 그 집에 다녀가는 정도, 그저 밤이슬을 피해 잠자리를 마련하는 정도의 삶을 그곳에 맡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내가 머물고 있음으로 해서 집 전체가 활력을 띤다는 사실이다. 그는 매일 어딘가로 출퇴근을 한다. 곧 소외됐던 집, 버려져 있던 대상에게 소통의 길을 튼다. 침묵의 세월이 이제 새 삶을 향해 길을 나선다. 겉으로 보면 한없이 정막하고 고즈넉하지만 이면에는 질긴 생명의 끈이 미래로 문을 연다.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이지만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다고 믿는 시인의 아름다운 진술에서 엿볼 수 있듯, 그의 시는 지나간 과거의 향기를 맡으면서도 미래지향의 풍경을 엿보고 제시하고 있다.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손에 몰렸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긴 것일까.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 같다.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비계(飛階)를 내려오는 석양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지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오래 발린다.

-「벽화」 전문

 

 

벽을 지우는 것, 그것이 혁신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어둠을 발라 새로운 벽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혁신이라고 말이다. 결국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는 재료가 된다. 시인의 이러한 긍정적인 시선은 대상의 남루하고 처연한 상태를 보여주는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날개다」에서 “#@%, 0%^$&*%ㅒ#@!$#*?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로 표현되는, 언어로 분절되기 이전의 상태로 쏟아내는 뇌성마비 언어장애인의 말처럼 그것은 덩어리로 온다. 과거와 미래의 가름이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시인의 긍정은 부정을 통해서다. 이렇듯 문인수 시인이 깊은 성찰을 매개로 그늘진 대상 하나하나에 존재를 바치는 그 마음을 우리는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만날 수 있다.

 

평론가 김양헌은 의도한 정교함보다 온몸에 밴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시 형식으로 온몸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을 일러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그릇을 빚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는 시인 문인수가 대상을 보는 기관은 두 눈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대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부정과 긍정이 밀고 당기며 화해하는 서정의 기본 골격이 작품을 떠받치고 있는 시를 쓴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거칠면서도 자연스러운 이런 형식이 바로 인(仁)을 담는 가장 적절한 그릇, 대교약졸의 그릇”(「해설), 132면)이라고 강조한다. 게다가 『배꼽』에는 “때로는 처참하게 때로는 담담하고 냉정하게 시의 표정을 바꾸면서, 안타깝고 한스럽고 포근한 손으로 실존의 배꼽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마음이 가득 차 있다.”(127면) 아무런 저의도 없이, 인식 이전에 이미 온몸에 무르녹은,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시의 밑자리를 두툼하게 돋운다. 시인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시인의 말))

 

이번 시집에서 문인수는 아름다운 풍경이 빚어내는 사람을 노래하는 것에서 사람이 살을 섞고 살아가는 풍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람이라는 기막힌 풍경은 절반이 축축한 그늘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시인의 인식이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은 그 그늘을 햇볕에 내어 말리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노래할 때 슬픔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절창들도 가득 찬 이번 시집에 대해서 많은 설명은 필요없다. 황동규 시인이 추천사에서 밝히고 있듯, “문인수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없다. 꿈틀거리면 질펀하게 번지는 절창 시편들을 직접 만나면 될 것이다.”

목차

제1부
꼭지
만금이 절창이다
중화리
서정춘
지네-서정춘전(傳)
벽화
경운기 소리
1주기, 경운기 소리
주산지
얼룩말 가죽
파냄새
비닐봉지
대숲

제2부
흉가
줄서기-인도소풍
도다리
뻐꾸기 소리
식당의자
굿모닝
책임을 다하다
광장 한쪽이 환한 무덤이다
뫼얼산우회의 하루
바다 이홉
비둘기
배꼽
아마존
저수지 풍경
아프리카
도망자

제3부
수치포구
엉덩이 자국
녹음
골목 안 풍경
매미소리

쇠똥구리 청년
다시 정선선
오백나한 중 애락존자의 저녁
헛간 서 있다
유원지의 밤
방, 방
없다

제4부
향나무 옹달샘
막춤
미역섬
방주
이것이 날개다
동백 씹는 남자
눈보라는 흰털이다
저녁이면 가끔
오후 다섯시-고(故) 박찬 시인 영전에
흰 머플러!-시인 박찬, 여기 마음을 놓다
기린
조묵단전(傳)-탑
조묵단전(傳)-비녀뼈
낡은 피아노의 봄밤
흔들리는 무덤
송산서원에서 묻다
고모역의 낮달

해설│김양헌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문인수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적막 소리』 등이 있으며,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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