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책 소개

길 떠나는 자의 운명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녹아든 명편들

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이 열번째 시집 『낙타』를 출간했다. 오랜 기간 문단과 독자는 그의 시를 기다려왔는데, 『뿔』(2002)을 간행한 이후 6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신작시집을 들고 온 것이다. 이번 시집은 삶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편안하면서도 깊은 비유와 물 흐르듯 전개되는 어조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쉽게 시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한편, 읽으면 읽을수록 시인의 52년 시력의 내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이번 시집의 특징은 제목이 암시하듯, 떠남에 대한 시인의 연륜과 시적 사유가 얼마나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은 시인의 눈은 이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는 풍경을 엿보게 되고, 그것을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낙타」 전문)

생을 다한 뒤 저승길을 갈 때나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때 ‘낙타’를 타고 돌아오겠다는 표제작은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감동적이다. 생의 온갖 영욕과 욕망을 다 경험한 자가 생을 마감하고 다시 시작할 때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적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고, 그 길의 동행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거나 가엾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서원은 그 자체로 너무 맑고 깨끗한 정신을 보여준다. 마치 윤회의 고리처럼 순환적 구조를 가지는 이 시는 마지막 행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첫행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반복해서 여러번 읽을수록 점점 더 그 감동의 깊이가 더해져서 자연스럽게 읽는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명편이다.

이제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일종의 길떠남이다. 그러나 그 길떠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벗어나겠다는 초월의지와는 거리가 멀다. 손택수 시인의 말처럼 그의 의지는 “잠시 바람만 불어도 지상을 훌쩍 날아오를 기세”이나 “지상과의 접촉을 잊지 않게 위한 고집스러움”(손택수 ‘추천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세상과 삶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낸 시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이자 삶의 태도이다. 이러한 지상과 삶에 대한 애착은 닳고닳아 버려진 ‘신발’과 그 신발들과 “뒤섞여 나뒹굴고 있을” 화자를 동일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늘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아온 생을 어느 순간 “늘 그리워”하고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나의 신발이」)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한시도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 시인은 이미 고인이 된 가족들(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이 자신과 동거해서 행복하다는 상상력을 보여줄 만큼(「즐거운 나의 집」)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게다가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매화를 찾아서」) 된다는 통찰은 삶과 사람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에 대한 깊은 의지를 통해서만 모든 욕심을 버리고 생을 벗어나는 꿈을 꿀 수 있다는 점을 시인은 알려준다. 그런 뒤에야 ‘시원스럽게 낡은 몸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내 몸으로부터,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전속력으로 달려나갈’(「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생을 벗어난 다음 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 순정한 무욕의 정신을 펼쳐놓는다. 저세상도 “이 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이고 이세상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슬프고 또 조금은 즐겁고 조금은 지치기’(「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시인은 삶이 반복될지라도, 이승의 기억이나 꿈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서러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이 잔잔하고 맑은 다짐은 묘하게도 서럽고 뭉클하게 울린다.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눈」 부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귀로에」)거나 “이룬 것이 없어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어 아름답”고 “내 젊은 날의 꿈처럼 허망해서 아름답다”(「그 집이 아름답다」)는 시인에 고백에 이르면 이 서러움과 애잔함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먹먹하게 다가온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러한 길떠남은 자연스레 여행으로 이어지는데 4부와 5부의 여행시들은 또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터키―평양―네팔(히말라야)―콜롬비아(메데진)―미국(샌프란시스코, 미시건)―프랑스(보르도)―몽골로 이어지는 시인의 여정은 세계 각지에서 느낀 여수(旅愁)를 완성도 높게 시에 담아낸다. 흔히 여행시가 가지는, ‘지나가는 자의 관찰’에서 오는 섣부른 묘사를 뛰어넘어서 생생한 삶의 현장과, 거기서 오는 깊은 깨달음과 해학은 이 시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미를 선사한다. 이승과 저승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시인의 인식처럼 이 여행시들 또한 ‘이곳’과 ‘그곳’ 역시 쓸쓸하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임을 절절하게 들려준다. 이국의 문물과 삶을 담아낸 여행시에서 이토록 깊은 여운과 시적 깨달음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시인의 날카롭고도 깊은 시안(詩眼)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부에 묶인 시들은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세계화와 문명에 대한 비판(「공룡,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이슬에 대하여」 「Cogito ergo sum」), 인간의 재난과 비극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이를 방치하는 신(神)을 향한 대결의지와 좌절감(「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용서」 「하느님은 알지만 빨리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저 높은 데서」),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동시 칠수(童詩七首)」) 등을 보여주고 있어 시읽기의 고통스러움과 함께 다채로운 재미를 느끼게 한다.

시집 말미에 덧붙인 시인의 ‘산문’(「나는 왜 시를 쓰는가」) 역시 시인의 숨겨진 인생역정과 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특히 시에 대한 솔직하고 담담한 시인의 고백은 후학과 시단, 그리고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127면)

오래 기다려온 신경림의 신작시집은 기대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던져준다. 시인은 시집 전반에 걸쳐 정주와 떠남,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이곳과 저곳에 대한 사유와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한편 한편에서 깊어진 시인의 연륜과 깨달음을 쉽고 편안한 시어와 어법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여느 젊은 시인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길을 떠나는 시인에게 시는 인생의 절경과 아름다움, 쓸쓸함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길과도 같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삶과 죽음의 의미와 인생의 불가해한 이면에 대해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신경림 시인이 우리 시단에서 차지하는 육중하고 든든한 위치를 새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인은 이제 “꽃이나 열매보다 뒤틀린 가지와 몸통이 더 향기롭고 아름답다”(「고목을 보며」)는 경지에 이르렀고, ‘허공의 그림자나 얼룩’(「허공」)으로 남고자 소망한다. 『낙타』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 살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펼쳐서 숙독해야 하는 시집이다. 점점 더 각박해지고 메말라가는 시대에 낙타와 나귀를 몰고 길을 떠나는 시인의 목소리는 황폐화된 삶의 사막에 떨어지는 눈물처럼 우리 내면을 따스하게 적셔줄 것이다.

목차

제1부
낙타
이역(異域)
허공
고목을 보며
나의 신발이
즐거운 나의 집
어쩌다 꿈에 보는
버리고 싶은 유산
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폐도(廢都)
나와 세상 사이에는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
귀로(歸路)에

제2부
그 집이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아름다운 저 두 손
그녀의 삶
너무 오래된 교실
매화를 찾아서

제3부
공룡,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용서
하느님은 알지만 빨리 말하시지 않는다
Cogito, ergo sum
그분은 저 높은 데서
이슬에 대하여
동시 칠수(童詩七首) ㅡ 아기 노루•소리•추운 별• 꼬부랑 할머니가•우리 아기 깰라•쿨쿨•겨울잠

제4부
인샬라
카파도키아의 호자
코니아의 동전
따듯한 손, 할머니의
유폐
유경소요(柳京逍遙)
유송도(游松都)
나마스테
하산음(下山吟)
포카라, 번다, 마차푸차레
히말라야의 순이

제5부
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차이니즈 레스토랑
팔레스타인 해방 만세!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꼽았다는
미국기행
세계화는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
보르도에서 만난 부처님
사막 건너기
초원의 별
어깨
조랑말

산문│나는 왜 시를 쓰는가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신경림

    申庚林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농무』이래 민중의 생활에 밀착한 현실인식과 빼어난 서정성, 친숙한 가락을 결합한 시세계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바꾸며 새 경지를 열었다. 70년대 이후 문단의 자유실천운동·민주화운동에 부단히 참여하여 당대적 현실 속에 살아숨쉬는 시편들로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농무』『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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