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시선 432)

책 소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무엇으로든 빚어질 수 있어요

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삶의 안쪽을 끈덕지게 탐구하는 단단하고 맑은 시편들

 

섬세한 감성의 언어와 선명한 이미지로 독자적이면서도 빼어난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전동균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가 출간되었다전동균 시인은 1986년 『소설문학』으로 등단한올해로 시력 30년이 넘는 중견 시인이다등단한 지 1년 만에 잡지사가 문을 닫는 곡절이 있었으나 이후 김기택장석남 시인 등과 함께 시운동’ 2기 동인으로 참여하여 동시대 시인들 가운데 전통 서정의 시혼(詩魂)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단단한 시세계를 다져왔다젊은 나이(24)에 등단한 뒤 등단 11년 만에 첫 시집을 펴냈고이후 꾸준한 창작 활동을 거쳐 최근 백석문학상(2014)과 윤동주서시문학상(2018)을 수상하는 등 평단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백석문학상 수상작 『우리처럼 낯선』(창비 2014)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자각과 통찰의 심오한 세계를 보여준다차분하고 담백한 어조인 듯하면서도 강렬하고 비감한 목소리에 때로는 따뜻한 해학이 깃든 시편들이 깊은 울림 속에서 공감을 자아낸다윤동주서시문학상 수상작(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 외 6)을 비롯하여 총 51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괜찮았다

슬픔과 고통뿐인 삶을 보듬는 따뜻한 사랑의 노래

 

있음과 없음삶과 죽음순간과 영원소통과 불화 등 이항대립의 실존적 사건이 뒤죽박죽 얽힌”(최현식해설이번 시집에는 신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감성이 두드러진 시가 적지 않다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오로지 종교적 죄의식이라든가 영적 각성에 침잠해 있는 것은 아니다정작 시인의 눈길이 가닿는 곳은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지금여기의 현실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안쪽이다시인은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 속에서 삶과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는다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슬픔과 고통뿐인 삶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와 기쁘다고”(「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 했다. “곁에 있어도 안 보이는 것들”(「잊으면서 잊혀지면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의 그림자를 늘 깊이 응시하면서불화의 세계를 함께 견디어내며 살아가는 타자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시인은 시가 깨진 그릇 같은 존재들”(1205호」)을 위로하는 기도가 되고 슬픔을 빛으로/신음을 향기로 내뿜는”(「춘수(春瘦)노래가 되기를 소망한다그리하여 빛이 없는 찬란”(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을 발견하고자 세상을 더 멀리더 깊이”(「물속의 기차」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길이 더없이 애틋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추천사
  •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라는 구절에서 쿵 그랬다. 아프니까 내가 남 같지가 않더라, 하는 게 늘상 내 입말이었으니까. “나는 내 손님이었구나”라는 구절에서 또 쿵 그랬다. 나는 내 주인이구나, 하는 게 일상 내 태도였으니까. 그게 뭐 별 문장이라고 그리 유난스러운 쿵쿵거림이냐 하면 무심한데 세심하게 굴러떨어져 나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으나 일순 나를 멈춰 세우게는 한 돌의 심장 소리를 들어버려서라는 말은 할 수 있으리라. 이 들림의 열림, 그 사이를 들락거리는 바람의 있고 없음, 빨랫줄에 널려 말라가는 젖은 빨래의 무거움과 가벼움, 덕분에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앉았어도 또 하나의 나를 만난 듯한 안도를 언도받기도 했지. “오늘 하루도 다 갔네, 뭘 했는지 몰라”…… 그러게, 그렇지. 이생이라는 게 사는 내내 갔는데 모르겠는 그것이지. 지나온 것만은 분명함을 알겠다 싶은 그것이지. 그러하니 시인은 제 안에서 저의 바깥으로 자주 걸어나올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그래도 괜찮았다,가 아니라 “그러나 괜찮았다”라는 말. 왜 좋지. 글쎄 왜 좋을까 하면 ‘그러나’의 돌려세움, ‘그러나’의 전반과 반전이 가져다주는 몸 비틂의 힘, ‘그러나’의 그러나저러나 결국엔 우리 모두 지나가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사실이 주는 절망의 희망. 내가 바닥이다 싶었는데 그 바닥에 박힌 돌 같은 시를 만났으니 요리 엉기고 조리 엉켰거늘 더불어 이 부러움을 어쩔까, “허리띠는 또 한칸 줄어드는데”라니!
    김민정 시인

목차

1

약속이 어긋나도

‘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

예(禮)

이토록 적막한

누구의 것도 아닌

이것

이 저녁은

정오

허기의 힘으로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사랑 혹은 흑암

흰, 흰, 흰

밤마다 먼 곳들이

그러나 괜찮았다

 

2

가을볕

보말죽

독바위

잊으면서 잊혀지면서

거돈사지(居頓寺址)

손님

죄처럼 구원처럼

춘수(春瘦)

원샷으로

아무 데서나 별들이

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한옥(韓屋)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3

오대산장

멧돼지는 무엇일까

술을 뿌리다

천둥 속의 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문밖에 빈 그릇을

필터까지 탄

밤의 파수꾼

녹지 않는 얼음

내 대신 울고 웃는

마른 떡

 

4

봄눈

1205호

눈은 없고 눈썹만 까만

눈물을 외롭게

이번엔 뒷문으로

모래내길

내 곁의 먼 곳

부끄럽고 미안하고 황홀해서

변명

검은 빵

물속의 기차

P

당신 노래에 저희 목소리를

 

해설|최현식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전동균

    196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과 윤동주서시문학상을 받았다.

경주 대릉원 고분동네가 가끔 생각난다.
천마총이 발굴되면서 마을은 지상에서 지워졌고, 나는 대구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게 되었지만, 이따금 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소년은 그곳의 사람들과 흙냄새, 오래된 한옥들과 마당의 연꽃무늬 돌들, 무덤 위로 떠오르는 달빛과 짐승 울음소리, 새벽의 흰 물그릇…… 그 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풍경을 더듬더듬 불러내곤 한다.
 
말을 의심하면서도
말을 구하고 또 의지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징검돌을 놓는다.
 
징검돌일까?
 
2019년 5월
전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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