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3 2019년 2호(통권8호)

책 소개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현실, 투쟁, 기울어진 세상을 넘어

 

주목: 일×존엄을 상상하기

『문학3』 2019년 2호가 출간되었다. 이번호 주목란에서는 ‘일×존엄을 상상하기’라는 주제로 다양한 노동현장 속에서 감지되는 일의 양상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고민들을 살펴보았다. 담론이기 이전에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구체적인 조건으로서의 노동을 짚어보는 기획이다. 물론 여전히 변하지 않은 노동조건, ‘투쟁’으로밖에 존엄을 찾을 수 없는 현장도 이번 기획의 사례를 넘어 존재한다. 다만 이번 주목이 기울어진 세상의 문제를 포함하여 일노동과 무관한 삶은 없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나아가 내 삶 그리고 세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활동을, 우리의 잠재력과 존엄까지를 고민케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우선은 노동(labor)이라는 말에 가려진,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work)으로서의 ‘일’에 대한 글이 눈길을 끈다. 대한항공 승무원 박창진의 글은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을 겪은 뒤 직장에 대한, 노동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해고와 복직,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 등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만두기’가 아니라 ‘일하기’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나를 둘러싼 노동현장의 일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인기를 얻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동식은 소설가라는 직업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을 되짚는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거쳐온 여러 직업을 일별하고, 마침내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된 과정을 진솔하고도 담백하게 고백하는 글이다. 출판편집자를 거쳐 인권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우공은 ‘노동’과 ‘활동’이라는 두 단어를 중심으로 정당하게 활동하기 위한 노동을 고민하는 글을 보내주었다. 활동의 성격을 가진 노동,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 노동의 조건을 더 낫게 하는 활동 등에 대한 사례를 다루며 ‘노동은 무엇이고 활동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그 자체의 의미를 세심하게 환기한다. 

한편 기존의 노동자가 ‘정규직 남성’으로 대표됨에 따라 노동 문제 안에서도 주변으로 배제되었던 다양한 일의 영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젠더문제연구소 이제(IGE)의 연구자 임국희는 양육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노동과 재생산노동에 대해 논한다. 이러한 노동들이 여태껏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평생에 걸쳐 돌봄노동에 ‘오염’되지 않은 삶은 없다고 지적과 함께, 타자를 돌보는 경이로움을 재현할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던지는 글이다. 맥도날드 라이더로 일하며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박정훈의 글은 점차로 커지는 비정규 노동시장의 현실과 기본소득 제도의 가능성을 논한다. 노동자의 생존권이 아니라 백수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으로 진정한 노동해방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이분법적 통념에 문제의식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문학평론가 선우은실이 최지인과 정한아의 시를 중심으로 최근 시에서 드러나는 노동의 장면을 읽는다. 기존 ‘노동시’의 둘레를 벗어나 ‘새로운’ 노동시를 정의하는 글이다. 시란 무엇이고 노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깝게 가닿고자 하는 문학적 작업이 미덥다. 

창작과 중계

이번호 소설란은 김미월 듀나 이승우 이현석의 작품과 원고모집으로 선정한 서장원의 작품으로 채웠다. 저마다 소설가의 치열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단단하고 여운이 깊은 작품들이다. 란에는 곽은영 유계영 진은영 최현우, 그리고 시요일 앱의 「시作일기」를 통해 선정한 김상운의 시를 수록했다. 서로 다른 시선과 세계가 담긴 작품이 어우러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중계 코너에서는 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 출판편집자 염은영, 인권기록 활동가 홍은전이 소설을, 소설가 김유진, 싱어송라이터 신승은,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 진행자 풍문이 시를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었다. 

 

현장과 시선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이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자원활동가’ 활동을 해온 공유정옥이 ‘반올림’ 활동 시작부터 삼성과의 중재합의까지 12년을 정리하는 글을 보내주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겪을 수 없음을 절감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고통을 나누는 ‘우애’가 시작된다고 믿는 필자의 고민이 생생하다. 한편 변호사이자 연극배우로도 활동하는 김원영은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장예인 예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장애인 무용 워크숍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논한다. ‘아름답지 않은’ 장애인의 몸이 혐오, 무시, 멸시의 시선을 넘어 무대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 그 어떤 것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이 된다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시선란에는 2019년 3월 9일부터 4월 1일까지의 광주를 대안학교 교사이자 사진작가 강경필이 사진과 글로 남겼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구도에서만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다. 이어서 『저 청소일 하는데요?』의 작가 코피루왁이 불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일회용 플라스틱 컵 재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문학웹과 문학몹

1월부터 시작한 문학웹(www.munhak3.com)의 새 코너 ‘시작하는 사전’은 『문학3』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윤다혜를 시작으로 류진 주민현 유이우 최지은 이영재 성다영 홍지호 남지은 노국희 시인이 보내온 다채로운 신작시로 채웠다. 올해 말까지 정은영 정다연 박승열 강지이 등을 포함해 총 26명의 시인이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다. 한편 ‘3×100’ 코너는 4월 박솔뫼와 신해욱의 연재 종료로 2019년의 첫번째 연재를 마무리했다. 두 작품 모두 빛나는 문장들을 따라 생경한 풍경 앞에 서게 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6월부터는 소설가 강화길의 연재가 화요일마다 그리고 장류진 서현경 아다니아 시블리의 단편이 매달 목요일마다 찾아온다. 문학몹은 지난 3월 문학몹 333 두번째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로 독자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박소란 백은선 유진목 시인이 참여해준 ‘언니들의 시가 돌아왔다: 7~80년대 여성시 다시 읽기’ 행사, 장혜영 감독이 함께한 「어른이 되면」 공동체 상영회와 GV 모두 많은 분들이 자리해 소중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오는 7월에 있을 문학몹 행사에도 역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목차

신용목 / ‘내가 계속할게’

 

주목: 일×존엄을 상상하기

박창진 「일함의 선택은 나의 것이다」

임국희 「돌보는 일을 다시 쓰기」

박정훈 「알바노동과 기본소득」

김동식 「소설가 이전과 이후의 삶」

우공 「정당하게 노동하기 위한 활동을 고민한다」

선우은실「노동을 해보았느냐고」

 

곽은영 「여름곤충탐험대」 「몽상의 영역」

김상운 「혹등고래」 「나무 3」

유계영 「버거」 「송신(送信)」

진은영 「빨간 풍선 같은」 「모자」

최현우 「자동 나비」 「한겨울의 조타수」

중계 「어떤 시가 내게 말을 걸어서」 / 김유진 신승은 풍문

 

소설

김미월 「선생님, 저예요」

듀나             「왕의 넋」

서장원 「주례」

이승우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이현석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중계 「간편하지 않은 생각」 / 서늘한 여름밤 염은영 홍은전

 

현장

공유정옥 「‘고통을 덜 순 없지만 나눌 수는 있다」

김원영 「비례적인 권리와 반(反)비례적인 아름다움?」

 

시선

강경필 「광주, 2019년 3월 9일부터 4월 1일까지」

코피루왁 「불멸의 삶」

수상정보
저자 소개

“내가 계속할게”
 
이번호를 준비하는 동안 봄이었다. 3월과 4월과 5월. 다른 계절과 마찬가지로 이 시간 동안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우선은 일상의 일들. 학생들이 새로운 교과서를 받아 첫장을 펼치거나 농부들이 땅을 갈고 논에 물을 대는 일 혹은 한해살이 화초의 꽃씨를 뿌리는 일 같은.
그리고 마음의 일들이 있다. 매번 시작되고 다시 다치고 또 쓰러지는 일들을 마음의 것이라 하여 그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억’은 비록 과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생생한 현재의 것이고, 기억이 이끄는 슬픔과 분노, 어떤 원망과 죄책감 역시 실감으로 살아 있으니, 그 일들은 ‘실재’한다.
 
무엇보다도, 다섯번의 4월 16일과 서른아홉번의 5월 18일과 쉰아홉번의 4월 19일 그리고 백번의 3월 1일이, 여전히 고통으로 체험되는 이유는 그날을 향한 역사의 질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역사’라는 단어에 골몰했던 때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용서될 수 있는 만큼만 용서되어야 나머지가 사랑으로 남는다.” 여기에는 ‘예수가 20세기에 왔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용서될 수 없는 ‘부분’에 매달리는 사이 한세기가 갔다. 다시 ‘21세기에 온 예수의 말’을 가정하며 그는 자신의 말을 이렇게 수정했다. “용서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뉘우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에게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이 말은 좀 무섭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과 달라서도 그렇고, 어떤 이들은 끝내 용서할 수 없다는 말로 들려서도 그렇다.
그러나 저 말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진실에 더 가까워서가 아닐까. 용서를 통해 마음을 돌리려 했던 예수와 달리,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
이념이니 권력이니 자본이니 하는 것들은 마음이 없으니, 이념과 권력과 자본이 그들의 전부가 된 이상은 말이다.

0 reviews
리뷰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