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거울

책 소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세계를 직관하는 언어”

2017년 만해문학상 수상자 김정환의 신작 시집 출간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후 시력 38년 동안 시 외에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정력적인 저술 활동을 펼쳐온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개인의 거울이 출간되었다. 시인의 24번째 시집으로, 장시집 소리 책력(민음사 2017)을 펴낸 지 불과 1년 만에 내놓는 것이니 역시 놀라운 창작력이다. 이번 시집에는 2017년 만해문학상 수상작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문학동네 2016) 이후 발표한 작품들을 모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육체의 늙음과 지리멸렬한 누대의 시간을 포착해내는 깊은 통찰 속에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심오한 명랑성”(최정례, 추천사)이 담긴 활력 넘치는 시편들이 묵직하다. 특히 독특한 구성으로 짜인 제2부의 시들과 시집 끝자리에 놓인 장시 「보유―카탈루냐 지도 재고(再考)」를 주목할 만하다.

 

내 안으로 계속 들어서는 나의 장면들 나를 벗고/장면을 벗고 ‘들’만 남는 깊이가 액체 투명보다 더/출렁이는 느낌./이게 나라면 명징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보루 혹은/무늬가 죽음일까/밑반찬일까, 생이 신(神)을 신이 죽음을 죽음이 다시/생을 거울 속 거리(距離) 없는 비유로 얼마나 닮아야/결과일 수 있을까./검음에서 노랑의/자유./성가신 신성, 절묘한 언밸런스도 벗기며/벗겨지는 시간.(「서(序)」 전문)

 

시가 언어로써 세상을 직관하는 것이라면, 직관은 세상에 대한 사유의 설명이 아니라 비약을 필요로 한다. 김정환의 최근 시편들은 그러한 사상적 비약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데, 시가 단지 “삶의 음풍농월”(「보유」)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시인은 그 사유의 굴곡을 “빈 화분이 이미 빈 화분 아니고 비로소 집이다”(「빈 화분」)와 같은 식으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명제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관념의 비약을 통해 시인은 “나이를 해부하고 나이 든/육신, 잘 안 들리는 청각과 잘 안 보이는 시각을/해부”(「강한 성(城)」)하면서 “생애 아닌 생의 한 장면을 아프게/도려낸 광경”(「눈 오는 날」)과 “내 안으로 계속 들어서는 나의 장면들”(「서」)처럼 반복되는 사물들의 세계를 냉철히 응시한다.

 

가장 끔찍한 것이 죽음의 치정이다. 그래서/40년 뒤/명작이 있다./여러겹 의미심장이 여러겹으로 이상하다./죽음이 발굴하는 거지 생 아닌/생의 죽음을./역사 아닌 역사의 죽음을. 육체 아닌/육체의 죽음을. 언어가 끝없이 (네?) 몸 향해/기울고, 언어 아닌 언어의 죽음을./화 아니라 뿔 난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운명도, 결국 우리 살 뜯어 먹고 산다는 듯이./들숨 날숨만 남을 때까지 말이지.(「인위적」 부분)

 

문학평론가 박수연은 해설에서 최근 김정환 시의 주제를 “반복, 시간, 일상 사건”이라 보고, 이번 시집의 묘사 주제를 “반복의 운동으로 벗겨져서 순수한 물질로만 남는 존재들”이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이 주제에는 “상처로 깊어갈밖에 없는 생”(「틈과 새」)과 “생의 일부인 죽음”(「유리컵」)에 결합된 ‘누대의 시간’, “반복이 반복을 능가할 때까지 반복하는”(「보유」) 시간이 동반되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나를 능가하며 살아남지 않는/죽음도 이성의 일”(「흐린 하늘」)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죽음의 생애는/빛바래지 않는다는 듯이”(「서(序)―말씀」) “생의 배후인 사물의 배후인/죽음의 윤곽을 끝까지 놓치지”(「이단 너머」) 않는다.

 

엄동설한 잔디 옷에 쌓인 눈 남향으로 반씩 녹은/무덤들의 눈부신 일렬. 다 살고 나서 보기에도/아름다운 것은 그것뿐이다. 사실은 거의 유일하게/실패하지 않은 형상화.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그 바깥에서도 모든 것이 새롭다는 뜻. 그 안에/시간이 없는 그 바깥에서도 위험할 게 없다는./안에 바깥에 혹시 공간도 없는 듯 주객(主客)은/아예 없었던 개념인 듯. 쨍쨍한 햇살로 은총이/완성된다, 얼음 차갑게. 아무렴 죽음은 캐치워드,/진부할 수 없으므로 게으르거나 부도덕할 수 없는/유일한 기득권이다. 기득권자 없는 기득권.(「결(結)―무덤2」 전문)

 

자연의 죽음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유하는 시인은 “은, 는, 이, 가, 을, 를 따위가 사라지면서 사물의/죽음이 더 공평해진다.”(「보유」)라고 쓰고, 죽음과 같은 부재를 “투명한 시간”(「부재의 전집」)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시인이 “나이 너머로 아름답게/늙은 몸이 바로 보석이다”(「방법」)라고 말할 때, 죽음은 생물학적 소멸의 차원을 넘어선 ‘신생의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리하여 시인은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 아닌 ~’과 같은 부정 반복의 새로운 언어 형식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불러오기도 하면서 “사랑 노래에서 없는 사랑 노래까지” “더 투명하게 없는 사랑 노래의 시간”(「부재의 전집」)을 노래하는 것이다.

 

사탕처럼 달기 위하여/몸이 너를 향해 한없이 줄어든다./식물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당분이 다 빠져나간 것을/본 후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화가들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색 쓰고 색을 쓰며 온몸이 투명한 유리의/타자로 될 때까지 사랑은 계속된다./시인들이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한행보다 더 가는 몸의 마지막 남은/성가신 의미가/유리로 될 때까지.(「유리」 부분)

추천사
  • “삶의 음풍농월이 시라면/삶은 어쩌라고?”(「보유-카탈루냐 지도 재고」) 복잡한 문장 속에 숨은 이런 심오한 명랑성을 찾는 재미에 김정환의 시를 읽는다. 시인은 죽음과 육체의 늙음과 지리멸렬한 누대의 시간과 시를 말하지만 실은 그 속에 있는 의외성을 생명이라 여긴다. 착란의 시선으로, 때로는 반짝이는 명랑함으로 무차별적인 죽음과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삶의 균열 속에서 쉼표처럼 깜박이는 웃음을 찾아낸다. 그 웃음, 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웃고 있는 동안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간다는 것이 도무지 무슨 일인지 모르고 흘러가고.
    최정례 시인

목차

서(序)

 

제1부

인위적

눈 오는 날

빈 화분

강남 스타일

백년 동안 새로운 노년

매미

소리 국밥

조토(1266~1337) 단테(1265~1321) 초상

와설(臥雪)

부재의 전집

에피소드

에피소드 2

물리

실존인물 실물크기 석상

 

수상정보
저자 소개
  • 김정환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0년 『창작과비평』에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해방서시』 『우리, 노동자』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희망의 나이』 『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 빈 극장』 『순금의 기억』 『김정환 시집 1980~1999』 『해가 뜨다』 『하노이-서울 시편』 『레닌의 노래』 […]

『내 몸에 내려 앉은 지명』 이후 여기저기 발표한 작품들을 주로 모았다.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데뷔했으니 거의 꽉찬 40년 세월이 흘렀다. 대대(代代) 창비 식구들 혹은 역대(歷代) 창비라는 식구, 고맙다.

2018년 7월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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