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인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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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응축된 결의로 삶의 비참을 보듬는 뜨겁고 믿음직한 손길

 

무엇 때문에 인양할 것인가 인양할 이유가 사라진 것 무엇 때문에 구출할 것인가 구출의 이유가 사라진 것//(…)//무엇 을 인양하려는가 누구는 그걸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을 건져올리는 기술은 존재 하지 않고 희망이 세상을 건져올린 적은 한번도 없다 그것 은 희망으로 은폐된 폐허다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다 인간 의 폐허다(「인양」 부분)

 

한국 노동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노동의 삶에 뿌리를 둔 일관된 시정신과 끊임없는 갱신으로 노동시의 위상을 한층 높여온 백무산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가 출간되었다. 노동자 문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의 근원에 대한 깊이있는 사유로 시세계를 확장하여 새로운 시적 성취를 일구어낸 대산문학상 수상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폐허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정곡을 꿰찌르는 치열한 인식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고뇌의 시선으로 “당대의 삶이 직면한 한계와 가능성을 투시하는 하나의 독특한 시학”(조정환, 해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자본의 폭력과 억압으로 둘러싸인 삶의 비참을 직시하는 냉철한 눈과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목소리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쩌다 한밤중 산길에서/올려다본 밤하늘/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하얗게 쏟아지는 우주//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나는 드러난다/내가 폐허라는 사실이//죽음이 갯벌처럼 어둡게 스며들고/사랑이 불같이 스며들고/모든 질서를 뒤엎고 재앙의 붉은 피가 스며들 때/나는 패닉에 열광한다//내게 고귀함이나 아름다움이나/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니다/내 안에 그런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그런 따위로 길이 든 적도 없다/다만 가쁜 숨을 쉬기 위해서/갈라터진 목을 축이기 위해서/존재의 소멸이 두려워 손톱에 피가 나도록/매달린 적은 있다/고귀함이나 사랑 따위를 발명한 적은 있다//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패닉」 전문)

추천사
  • 백무산은 한국시의 ‘백비(白碑)’다. 비문의 해독자들은 즐겨 노동해방을 읽고 무위와 노동의 결사를 찾아내기도 하고 우주적 생명의 감각을 탁본하기도 한다. 나로 말하자면 그의 시 속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가족사의 추억을 시대의 벽화처럼 그려보고 싶으나 글쎄, 그 모든 문자향 서권기를 후련하게 지워버리는 것이 백비의 언어다.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다해 자신을 잃어버”(「뭔가를 하는 거다」)리는 이 도저한 무의지의 의지가 경이로운 것은 그의 시가 끝끝내 결핍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핍의 감수성이 소진되었을 때 언어의 무중력이 찾아온다는 걸 흐릿하게 멀어진 옛 성좌들이 숱하게 증명하고 있거니와, 이순을 맞은 시인에게 결핍은 여전히 「기억의 소수자들」과 「세계의 변두리」로 귀환케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 힘이 “뒤에도 옆에도 사방 얼굴을 가진 열두 얼굴 부처님”(「뒷면」)처럼 모두가 ‘앞’이 되는 세계를 ‘인간의 폐허’와 동시에 보여준다. 그 사이의 심연이 지상의 비참과 만날 때 반어를 낳고, 소멸마저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 우주적 직관과 만날 때 돌올한 역설을 부른다면 어떨까. 소멸의 방식으로 현실을 기억하는 자의 각고 속에 욱신거리는 리얼리스트의 별자리가 외따롭게 빛난다. 누가 이 ‘비(碑)’를 다 읽었다 하는가. 그의 시는 아직 비밀을 간직한 미답의 영토다.
    손택수 시인

목차

제1부

풀의 투쟁

작성된 신

환생

물의 일생

패닉

호모에렉투스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겠으나

철거

허공 기차

시총(詩塚)과 백비(白碑)

광활한 폐소

꽃이 나를 선택한다

완전연소의 꿈

수상정보
  •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 2009년 제2회 오장환문학상
  • 2009년 제1회 임화문학예술상
  • 2012년 제20회 대산문학상
  • 2015년 제17회 백석문학상
저자 소개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요구에 현실이 선택되거나, 시의 행위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라면, 시가 오히려 삶을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 낭패다 싶은 것은, 허술한 내 처신에 있다. 돌아서면 시들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빨리 비워지고 자기혐오의 속도도 더 빨라졌다. 나도 내 것을 좀 지니고 살아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안된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2015년 8월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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