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할 일들

책 소개

생에 대한 저항과 사랑의 균형점에서 빛나는 시편들

읽는 이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아름다운 첫 시집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안주철 시인의 첫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창비시선 390)이 출간되었다. “시적 주제와 방법이 다양하고 말을 활발하게 밀고 나가는 저력이 확연하다”는 호평을 받으며 등단한 지 무려 13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시인은 등단 당시 “미래의 작품에 기대가 컸다”는 믿음에 부응하듯, 활력이 넘치는 언어와 감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치며 오랜 시간의 깊이와 무게가 가슴에 선뜻 와닿는 묵직한 시편들을 선보인다. 일상의 사물에서 감정의 깊이를 짚어내는 비상한 시선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황폐한 삶의 풍경 속에서 “‘운명’과 ‘운명을 바라보는 눈’이 시의 자기장 안에서 깊게 빛”나는 시편들이 “읽는 이의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낮게 스며들”(장석남, 추천사)며 뭉클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다.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유성처럼 흘러내릴 때/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병일 때/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아무 말 없이 엄마가/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이런 때/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밥 먹는 풍경」 전문)

 

생활 속에서 시를 찾아내는 예민한 감각이 돋보이는 안주철 시의 풍경에는 삶의 “충만함보다는 먼저, ‘사라지는 무언가’로 인해 남겨지는 황폐함”(양경언, 해설)이 짙게 깔려 있다. 심지어 시인은 자못 비장한 심정으로 “나는 사라질 것이다”(「눈 4」)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척박한 삶의 그늘과 황폐한 어둠속에서도 “살아서 길길이 날뛰”(「봄밤입니다」)는 이들이 있다. 시인은 폐허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집 같”(「모래로 빚은 봄」)은 처지가 되어 “나도 한마리/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삼나무숲」)할 수밖에 없는 고달픈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모든 것에 서식”(「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하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생활 속에 맺힌 물방울이/빛 한방울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희미하게 남아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추천사
  • 내가 발견한 모든 ‘좋은 첫 시집’의 공통점은 거기에 ‘운명’이 어른댄다는 점이다. 안주철의 첫 시집에는 간절히 감추고 싶었을 그것이 ‘돌아보면 슬쩍 숨는’ 얼굴로 도처에 어른대고 있으니 읽는 이의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낮게 스며들 시집임에 확실하다. 마치 첫 경험처럼.
    망설이다가 그냥 인용하기로 한다. “물이 식는 속도를 센다./(…)물고기가 더이상 도망가지 않을 때까지//엄마의 발가락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리자/피가 쏟아진다. 엄마는 등을 돌린다. 나는/저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대야에 붉은 꽃잎이 한장 두장/오래도록 펼쳐진다. 한송이가 될 때까지//(…)거울 속에 다시 노을이 끓는다.//나는 내 살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나는 못됐다! 그러나 가파른 언덕을 넘듯 이 시를 ‘읽어 넘어’야 했는데 힘겹고 아름다웠다.
    타고난 것에 대한 무한한 저항과 사랑의 균형점에서 시는 솟고, 그의 시가 꼭 그랬다. 궁극에서는 만들어진 시를 버리고 솟아난 시를 택하지 않던가. ‘운명’과 ‘운명을 바라보는 눈’이 시의 자기장 안에서 깊게 빛난다.

    장석남 시인

목차

제1부

밥 먹는 풍경

봄밤입니다

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

혀로 지은 집

살아남은 사람

함부르크

마을

거친 나무상자

별들의 서열

달 뜨는 밤

깨진 유리

모래로 덮은 말

꿈을 지우다

희미하게 남아 있다

노인이 되는 방법

눈 4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안주철

    1975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배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0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다음 생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음 생을 위해 야근을 하고
종이를 줍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행을 보태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래된 희망은 모두 사라졌지만
새로 만들어야 할 희망은 남았겠지요.
  
우리는 이미
다음 생을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2015년 6월
안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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