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저쪽

책 소개

폭력의 시대가 남긴 상처,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권력과 폭력, 그 안에서의 인간의 선택과 존엄의 문제를 치열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온 작가 정찬의 여덟번째 장편소설 『길, 저쪽』이 출간되었다.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을 통해 연재(2014년 9월~12월)했던 이 작품은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시대의 폭력을 배경으로 이 시대 비극적인 당사자들의 선택과 희생,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애잔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국가권력에 의해 청춘이 입은 깊은 상처, 여러 정권이 바뀐 현재까지도 여전히 보듬어지지 않는 ‘시대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인혁당 사건․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을 중심으로 한 유신정권의 부조리, 광주항쟁․민주화운동 등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군사독재시대의 폭력, 이명박 정권의 사대강 사업 등 희망이 없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그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사랑’을 통해 개인과 우리 사회의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숙명적 희생자’의 존엄과 슬픈 존재들의 아름다운 눈물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한 혹독한 한 생애를 잊기 위해 이 땅을 떠났던 연인이 새로운 사랑을 쓰기 위해 돌아왔다. 어느날 ‘윤성민’은 첫사랑 ‘강희우’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는다. 수배와 도피생활, 수감생활로 80년대를 보내던 성민이 감옥에 있던 1986년 10월, 편지 한장만 남겨놓고 프랑스로 떠난 희우에게서 이십칠년 만에 그를 초대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온 것이다. 성민은 희우를 만나기 위해 그녀와의 추억이 어려 있는 ‘정릉 옛집’으로 찾아 가고, 드디어 그녀가 과거 한국을 떠나게 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이유를 알게 된다.

 

상처는 깊었다. (…) 그것은 슬픔이기도 했고, 경이이기도 했다. 그 슬픔과 경이가 새로운 사랑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난 사랑이었다. 현실의 사랑이 아닌 꿈의 사랑이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어도 여전히 나는 목마른 청년이었다. 목마른 청년에게 진실은 현실 속에 있지 않았다. 꿈속에 있었다. 희우는 꿈의 존재였다. 세월이 흘러도 청년의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은 꿈의 존재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44면)

 

희우는 편지에서 나를 초대했다. 정릉 옛집으로. 그녀가 사라진 후 정릉 옛집은 꿈의 집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꿈의 공간으로 초대받은 것이었다. 이십칠년 동안 어두컴컴한 복도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 뒤에 어떤 풍경이 있을는지 설레기도 했지만 점점 더 두려워졌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큰 것은 그녀가 꿈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늙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45면)

추천사
  • 정찬은 진지하면서 치열하다. 그의 문학은 인간과 그 삶, 현실과 그 역사에 대한 집요한 탐구 속에서 그것들의 존재 양상과 그 의미를 천착한다. 세계의 모순들에 대한 치열한 추궁과 진지한 비판을 가해온 그가 이제 정면으로 제기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여기서 그가 묻는 것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이기보다 ‘사랑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라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는 그 문제를 유신 이후 그가 살아오면서 아프게 괴로워해야 했던 수배당한 시대 속에서 탐색하며 그 진상과 진의를 추적한다. 이 작업에서 당대의 사회적 억압과 인간 근원의 영원함이 서로 얽힘으로써 재현되면서 작가의 비관적 전망과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희망의 아우라를 비춘다. 그의 『길, 저쪽』은 설움에 젖은 오늘의 우리에게 그 슬픔과 믿음을 더불어 안겨준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 정찬의 작품은 언제나 정치와 윤리를 다루는 인문학이었고 연서(戀書)였다. 한국 사회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 치열하고 독특한 예술가는 사랑의 패배를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랑과 헌신의 형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 소설은 정찬의 여느 작품들처럼 읽기의 고통과 사유의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독자는 그의 깊이로 추락하게 되고 그 과정은 황홀하다. 
    독자는 어떻게 작가를 사랑하는가. 나는 정찬의 작품을 통해 성장했고, 그의 작품 덕에 외롭지 않으며, 그 힘으로 버티고 있다. 당대 우리의 삶은 줄 서서 형(刑)의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과 같다. 앞에서 일어난 혹독한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 ‘다음’이 자신의 순서가 되는 현실을 견뎌야 한다. 우리는 그 긴 행렬에 서서 그의 작품을 들고 투쟁을 시도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목차

1장  편지

2장  폐사지에서

3장  윤하

4장  정릉 옛집

5장  유랑

6장  초대

7장  시인의 죽음

8장  새의 꿈

작가의 말

수상정보
  • 1995년 제26회 동인문학상
저자 소개
  • 정찬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두 생애』 『정결한 집』,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 『빌라도의 예수』 『유랑자』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올해의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길, 저쪽』은 사랑에 관한 소설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랑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타오르다 시간 저 너머로 사라져갔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랑 가운데 똑같은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 똑같은 사랑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랑은 새로운 사랑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한국 사회의 역사적 풍경들이 밤의 강물처럼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1970년대를 시작으로 80년대를 굽이치면서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여기까지 밤의 강물은 사랑의 이야기 속에서 출렁거릴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살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역사는 뒤섞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밤의 강물이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흘러들어갈 수밖에요.
『길, 저쪽』의 씨앗은 지난 작품집 『두 생애』(문학과지성사 2009)에 수록된 단편 「희생」입니다. 이 작은 씨앗이 피어올린 새로운 생명을 독자와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2015년 5월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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