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책 소개

성찰과 연민의 눈으로 찾아낸 치열한 삶의 명랑성

 

1985년 불혹의 나이로 등단한 지 어느덧 서른 해.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다 싶을 만큼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며 서정시의 지평을 끊임없이 넓혀온 문인수 시인의 신작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가 출간되었다. 시조의 형식을 빌려 압축과 절제의 미를 선보이며 또다른 시적 역량을 보여주었던 『달북』(시인동네 2014)에 이어 새롭게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그간 응축된 언어에 실린 진지한 성찰과 곧은 시정신의 기품으로 서정의 미학을 펼쳐보였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명랑한 이야기는 왜 시가 잘 되지 않는가”(시인의 말)에 주목하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가는 ‘명랑성’의 세계를 펼친다. 시인의 ‘명랑성’은 역설적이게도 그늘진 우리 삶에 대한 오랜 성찰과 연민 끝에 걸어 나온다. 이 지난한 과정 끝에 시인은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인식에 가닿으며 삶과 현실의 참모습을 새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 바닥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자 그 허공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나희덕, 추천사)로서, 그 고요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유를 시편들을 통해 독자들에게도 선사한다.

 

마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거친 파도 소리에도 와르르 쏟아지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혀 꼬부라지는 골목들의 질긴 팔심 덕분인 것 같다. 폭 일 미터도 안되게 동네 속으로 파고드는 막장 같은 모퉁이도 많은데, 하긴 저렇듯 뭐든 결국 앞이 트일 때까지 시퍼렇게 감고 올라가는 것이 넝쿨 아니냐. 그러니까, 굵직굵직한 동아줄의 기나긴 골목들이 가파른 비탈을 비탈에다 꽉꽉 붙들어매고 있는 것이다. 잘 붙들어맸는지 또 자주 흔들어보곤 하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 헌 시멘트 담벼락에 양쪽 어깻죽지를 벅벅 긁히는 고된 작업, 해풍의 저 근육질은 오랜 가난이 절이고 삭힌 마음인데, 가난도 일말 제맛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이다.(「굵직굵직한 골목들」 부분)

 

사람살이에 바탕을 둔 문인수의 시에는 삶의 굴곡을 지나온 자의 느긋한 여유가 오롯이 스며 있다. 시인은 삶의 결을 포착해내는 남다른 시선으로 가난과 슬픔마저도 명랑한 기조로 승화시킨다. “덜덜거리는 인생”(악어 아가리의 각도」)을 가로막는 절벽 앞에서도 시인은 “절벽, 돌아서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바닥이나 걷자”(「절벽」)고 몸을 낮춘다. “어느 한쪽 벽에다 등을 대고/어느 한쪽 벽엔 가슴을 붙여 또 하루 비집고 들고 나”면서 “게걸음질을 쳐야 어디로든 똑바로 향할 수가 있”다며 “온통 애 터지게 좁”(「감천동」)은 생의 저편, 변두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틋한 눈길이 가닿은 풍경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다.

추천사
  •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 문인수 시인의 말은 풍경뿐 아니 라 사람살이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너무 빛나거나 반듯한 것들은 이 시집의 식솔이 되기 어렵다.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많고, 변 두리 동네가 주요 무대다. 거기서 오래 밟히고 버려진 것들, 구부정한 등을 내보이며 쭈그리고 있는 존재들이 도란도란 온기를 나누고 있 다. 세상이 이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가난과 슬픔의 힘으로 서로의 몸을 꽉꽉 동여맨 그 팔 힘 덕분이다.
    삶을 가로막는 절벽을 그는 “절벽, 돌아서라는 말씀!”으로 알아듣는 다. 그러고는 “게걸음질을 쳐야 그 어디로든 똑바로 향할 수가 있”다 며 “바닥이나 걷자”고 손을 잡아끈다. 때로는 탁발승처럼 때로는 늙 은 건달처럼 저잣거리를 걸어가는 그의 발길과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에게 직선은 왜 시가 되지 않는지를. 굽은 것이 왜 곧은 것인지를. 수평이 어떻게 깊이를 갖게 되는지를. 낮고 낮은 바닥이 우리가 제대로 걸어야 할 길이고, 텅 빈 허공이 우리가 공들여 닦아야 할 거울이라는 것을. 문인수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그 바 닥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자 그 허공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다.
    -나희덕 시인-

목차

1부

굵직굵직한 골목들

물빛, 크다

저 빨간 곶

눈 내린 날의 첫 줄

죽도시장 비린내

중력

별똥별

공책

폭우 바깥으로 간다

땅내

기러기 한 줄

고구마를 보면 낙타새끼가 떠올라

창밖

이웃

 

2부

조묵단전(傳) – 나비를 업다

조묵단전(傳) – 창밖목련

조묵단전(傳) – 멍텅구리 배 한척

늪의 달

산울림

함박도

명랑한 거리

은하철도가 있다

감천동

폐교, 나무들도 천천히 문을 닫는다

뺀찌

어마어마한 수단

와, 와, 통하다

묵호, 등대 텃밭

감나무

수상정보
  •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
  •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 2007년 제7회 미당문학상
저자 소개
  • 문인수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적막 소리』 등이 있으며,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랑한 이야기는 왜 시가 잘 되지 않는가” 중얼거리며 이번 원고를 꾸린 것 같다. 열한번째 시집이다. 아, 이거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시가 아니었으면 도대체 무엇에 기대살 수 있었을까” 싶다.
 
‘욕심’이란 말은 밉상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늘 시 쓰기의 큰 동력이었으니 뭐 해롭진 않았다.
 
그동안, 그러니까 2003년인가 내게 컴퓨터가 생긴 후 지금까지, 나의 ‘컴맹’ 사정을 해결해 ‘작품활동’을 가능케 해준 아들 동섭, 딸 효원에게도 이번 기회에 “고맙다, 참 수고했다”는 말 전한다.
  
2015년 봄
문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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