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나무

그리운 나무

책 소개

절제된 언어와 단아한 형식에 스민 여백의 미

1970년 등단 이후 40여년간 결곡한 시정신으로 오로지 “올바른 시의 경지를 추구하는 데 온 마음을 바쳐”(이숭원, 해설)온 정희성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그리운 나무』가 출간되었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시대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내면 성찰이 깃든 깨달음의 맑고 그윽한 사랑 노래를 선보인다.

“늦가을 밤바람이 문풍지를 떨게 하듯 애틋한 울림” 속에 “인간적이면서 역사적인 뜻을 담고 있”(구중서, 추천사)는 간결하고 투명한 시편들이 고요한 울림을 자아내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묵언의 경지에 이른 듯한 언어의 절제미와 단아한 형식에 스민 여백의 미학이 단연 돋보인다. 올해 지용문학상 수상작 「그리운 나무」를 비롯하여 모두 68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그리운 나무」 전문)

시인은 지난 시절 ‘분노의 감정과 미움의 언어’로 시를 써왔음을 반성하며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시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경박 천박한 세상”(「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이라고 개탄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이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여전히 야만의 그림자가 서성이는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은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더러운 시대”(「부끄러워라」)를 향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을 다시금 가다듬는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집 잃은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물구나무서서 보다」 부분)

 

 

시인은 “새천년 이래 나의 주제는 평화였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폭탄이야 어디에 떨어지든 누가 죽든” 아랑곳없이 무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하라 다그치는”(「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폭력의 시대에 희망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 시인은 한라산 바람의 목소리를 빌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노래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바람의 노래」)고 선언한다.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타자를 배려하는 상생의 삶으로서 평화를 꿈꾸어온 시인은 “풀잎보다 더 낮게/허리를 굽히”고 한껏 “자세를 낮추”(「두문동」)며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원리와 조화로운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

 

 

음지식물이 처음부터 음지식물은 아니었을 것이다/큰 나무에 가려 햇빛을 보기 어려워지자/몸을 낮추어 스스로 광량(光量)을 조절하고/그늘을 견디는 연습을 오래 해왔을 것이다/나는 인간의 거처에도 그런 현상이 있음을 안다/인간도 별수 없이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므로(「음지식물」 전문)

불임의 시대에 더욱 드높은 시정신

 

이번 시집에는 특히 참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시가 눈길을 끈다. 김근태(「그대를 잊지 못하리」), 리영희(「눈 밝은 사람」), 김대중(「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 노무현(「봉화산」) 등 시대의 불의와 맞서 싸우다 간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시인은 그들의 삶을 돌이켜보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어도 꿈쩍을 안했”(「하산주(下山酒)를 마시며」)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그것은 “이 맥 빠진 불임의 시대”(「우리들은 꽃인가」)에 “오래전에 죽은 이들을 생각하”며 “더는 슬픈 기념일을 만들지 말자”(「2010년」)고 호소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구나/나더러는 조시나 쓰라 하고/김근태가 또 먼저 갔다/고문 끝에 온 민주주의가/견디다 못해 몸이 굳어져갈 즈음/그 모진 고통의 기억/잊어버리고 싶기도 했겠지//우리들의 정신적인 대통령/그대를 잊지 못하리/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그대를 잊지 못하리」 전문)

 

 

‘서정시를 쓰기 힘든’ 냉혹한 시대를 거쳐온 시인은 이제 “좀비들만 지상에 남”은 “죽은 시인의 사회”(「부끄러워라」)에서 “다 내려놓고/단순하게 살고 싶”(「한거(寒居)」)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내비치며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성찰하고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타인의 삶과 시를 읽는 과정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은 “비문(非文)이/기막히게 명문이 되는 지점에”(「시인 고은」) 고은 시인의 위대성이 있음을 주목하고,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는 “병이 들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의 “조용한 착지법”(「밝은 낙엽」)을 발견하고서 진정한 시의 가치를 비로소 깨닫는다.

 

 

가파를 것도 없는 산길 오르다가/돌부리에 걸려 내 몸 패대기쳤습니다/단풍잎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지만/넘어진 김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지요/때 이르게 물든 나뭇잎 하나/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병이 들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이/누선(㴃腺)을 건드리며 떨어져내립니다/언젠가 나도 삶을 송두리째/패대기쳐야 할 날이 오겠지요/그날을 위해 저 나뭇잎의 조용한/착지법을 익히리라 생각했습니다/그러자면 욕망으로 가득 찬 육신과 영혼의/무게를 한참은 더 덜어내야 하겠지만요(「밝은 낙엽」 전문)

 

 

구두점 하나까지 완벽한 퇴고 없이는 한편의 시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정희성 시인은 과작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력 40여년에 이제 여섯번째의 시집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끊임없이 언어를 조탁하고 시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시심에 비추어보자면 ‘양보다는 질’이라는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고갯마루에서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바람 부는 날」)을 겸허하게 되돌아보며 결 고운 “좋은 시 한편 쓰는 일 말고/무엇이 나에게 더 남아 있겠는가”(「가을 엽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나지막한 음성이 가슴에 서늘하게 와닿는다.

 

 

아리고 쓰린 상처/소금에 절여두고/슬픔 몰래/곰삭은 젓갈 같은/시나 한수 지었으면/짭짤하고 쌉싸름한/황석어나 멸치 젓갈/노여움 몰래/가시도 삭아내린/시나 한수 지었으면(「곰삭은 젓갈 같은」 전문)

목차

제1부
선물
시인
바람 부는 날
한로(寒露)
벗이 보내온 유자를 받아들고
곰삭은 젓갈 같은
열암 선생의 우스갯소리
기도
그 꽃 좀체 필 기색 없으니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부끄러워라
고서화 경매장에서
근황
북방에서
물구나무서서 보다
두문동
불 꺼진 여자

제2부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가을 엽서
한거(寒居)
우리들은 꽃인가
씨뿌리기
시가 어디 아픈지
파적(破寂)
고백
그대를 잊지 못하리
은행
참요
스마트한 전쟁은 없다
바람의 노래
묵침의 님

음지식물
하동 시편

제3부
매미
표절
이 풍진 세상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다
밝은 낙엽
나의 아코디언
피나를 위하여
시인 고은
눈 밝은 사람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하산주(下山酒)를 마시며
시방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백비(白碑)
우도에서
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
시베리아
통영 시편
교감

제4부
그리운 나무
여름은 가고
노을고개
무쇠솥 같은 거나
단정학 앞에 서서

새벽의 얼굴
봉화산
시답잖은 시
후꾸시마
자웅암(雌雄巖)
변화
2010년
독서일기
옥천
유목민

해설|이숭원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정희성

    194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대전 익산 여수 등지에서 자랐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 『답청(踏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 『그리운 나무』를 펴냈다. 만해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가 어지간히 짧아졌다.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는
지용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겠는가.
그저 손을 들어 소리의 높이를 가늠할 따름이다.
새천년 이래 나의 주제는 평화였다.
그러나 평화는 날이 갈수록 평화롭지 않다.
“평화는 비싸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 말에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평화의 시는 평화라는 말 한마디 없이도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할 터이다.
나는 거기서 너무 멀리 있다.
내가 사는 시대가 그러하듯이.

2013년 가을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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