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허기지다

책 소개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 『춤』 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는 박형준 시인의 산문집 『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출간되었다. 쓸쓸하고 고독한 삶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낮고 고요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29편의 산문들에는 삶의 갈피를 더듬어 섬세한 작품을 써온 시인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인의 개인사가 드러나는 산문을 비롯해 시론, 시인론, 작품 분석, 계간평 등이 다채롭게 묶여 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을 어렵게 통과하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말하는 대목은 절절하고, 고향과 가족, 죽은 친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자신의 시론뿐만 아니라 여러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시와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어서 독자가 쉽고 편하게 시에 다가가도록 도와준다. 시인들의 숨겨진 일상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인터뷰나 후배 시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전하는 대목은 여느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글들이다.

 

 

 

제1부는 시인이 거쳐온 삶의 이력을 들려주는 한편 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처음 고향을 떠나와 수시로 바닷물에 침수되는 인천 빈민가에서 힘겨운 도시생활을 시작한 경험과 가난한 가족과 어머니의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를 붙잡고 살아온 시인의 기억이 가슴아프게 전해진다(「자식의 발자국을 되밟아가는 어머니처럼」). 박형준은 ‘시를 왜 쓰느냐’는 질문에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쓴다’고 답하면서 시인은 ‘미궁을 향해 나아가는 자’이고 세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음악을 팔지 않으며 어떠한 형벌에 처해지더라도 신의 영역인 세계의 비밀과 대결하는 자라고 강조하기도 한다(「시인이라는 것」). 일찍 세상을 등진 여림 시인을 추억하는 「침묵으로 나누는 대화」는 절망할수록 세상을 더 강하게 끌어안고 오로지 시에 대한 열정으로만 삶을 지탱하다 간 친구에 대한 안타까운 헌사이다. 생을 마감한, ‘침묵의 빛’으로 남은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말하는 대목은 눈물겹게 다가온다. 유년의 이발관 냄새와 그림들에서 서글프면서도 따듯한 기억을 끌어내거나 횟수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이사를 다녀야 하는 생활에서 마주치는 시적인 순간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왔던 시간의 발자국 속에서」, 경험과 기억의 변형을 거쳐 한 편의 시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풀어쓴 「이미지라는 껍질에 대한 명상」에서는 시인의 진솔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가난은 함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하는 「가난은 함부로 말해질 수 없다」와 평범한 농사꾼으로 일제시대 징용에도 끌려가야 했던 아버지의 삶을 통해 세상사를 비판하고 교훈을 전해주는 사부곡(思父曲) 「아버지의 노래」, 시인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 쓸쓸하더라도 시를 생각해야 한다는 「우주적으로 쓸쓸하다」 등은 시인 박형준만이 들려줄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다.

 

 

 

제2부는 시인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명한 시인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오규원 이성복 송찬호 고형렬 최하림 김기택 박주택 등의 시인들과 나눈 대화들을 쉽게 풀어써내서 그들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들 대부분이 시인과 인연이 깊어 속내를 잘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과 삶을 친절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성복의 성장과정과 습작시절,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 시골에서 욕심없이 살아가는 시인들의 면모 등은 여느 산문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숨겨진 시인들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고, 어려운 시론들 역시 시인의 산문을 통해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다.

 

 

 

시집 발문과 시 해설을 담은 제3부 역시 냉정하고 딱딱한 평론가들의 비평과는 달리 시와 시인에 대한 속깊은 애정을 담아 나누는 대화처럼 쉽게 읽힌다. 이 때문에 작품분석을 하는 글이 지루하지 않고 시에 대한 소박하고 진솔한 산문으로 읽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적 행보가 단죄의 대상이 될지라도 미당 서정주의 신앙에 가까운 시적 자의식이 투영된 수작들을 평가하는 글이나(「시인의 원적지」), 이시영의 한 편의 시 「나를 그리다」를 통해 시인의 애잔한 자화상을 포착해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는 대목(「그리다 만 미소 자국」), 그리고 나희덕의 시를 섬세하면서도 개성적으로 해석하는 것(「부서진 날개 울음소리」)은 이러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밖에 박철 장철문 문태준 고운기 조정권 등의 작품들도 시인의 눈을 통해 새롭고 아름답게 다시 빛을 발한다.

 

 

 

제4부는 2005년 『창작과비평』에 연재된 계간평들을 묶었다. 한 계절에 발표된 시와 출간된 시집들을 짚어가며 논한 이 글들은 다양한 시세계에 대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해석하는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어서 연재 당시에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좋은 시를 구별해내는 안목과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게끔 하는 이 글들은 시읽기의 친절한 안내자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과잉 생산되는 시(집)에 대한 성찰이나 최근 젊은 시단에서 넘쳐나는 말의 홍수와 산문화 경향에 대한 비판은 깊이 경청할 만하다.

 

 

 

힘겹고 고통스러울수록 그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면서 ‘살아야 한다’를 ‘살아가야겠다’로 수정해야 한다고 시인이 온몸으로 전해주는 메씨지는, 배고파서 밥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살아가고 시를 쓴다는 시인의 고백은 시를 사랑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우주적으로 쓸쓸하다

자식의 발자국을 되밟아가는 어머니처럼
시인이라는 것
뒤란의 빛ㆍ 김태정『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침묵으로 나누는 대화ㆍ 여림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
면도날 위를 걸어가는 민달팽이ㆍ 문성해 시인께
우리가 왔던 시간의 발자국 속에서
이미지라는 껍질에 대한 명상
아버지의 노래
가난은 함부로 말해질 수 없다
우주적으로 쓸쓸하다

제2부 시인을 찾아가는 길

견자(見者)와 날이미지 시ㆍ 오규원
가장 어려웠던 날들의 수첩ㆍ 이성복
꽃 보러 가는 길, 산경(山經) 가는 길ㆍ 송찬호
행간에 성성함의 징검돌을 놓는 시인ㆍ 고형렬
현실적 상징주의자ㆍ 박주택
침묵과 파동, 그 영원한 빈집에서ㆍ 최하림
고요하고 격렬한 잠의 균형ㆍ 김기택

제3부 느끼는 것이 전부이다

시인의 원적지ㆍ 미당의 시
그리다 만 미소 자국ㆍ 이시영 「나를 그리다」
공명통 안으로 추락하기ㆍ 박철의 시
부서진 날개 울음소리ㆍ 나희덕의 시
느끼는 것이 전부이다ㆍ 장철문 『산벚나무의 저녁』
늙은 풍경에 대한 관능, 혹은 샤머니즘ㆍ 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떠난 자를 위한 노래ㆍ 고운기 「소고(小鼓)」
누추함이라는 것ㆍ 조정권 「책이 사치를 누리고 있다」

제4부 이 계절에 시를 읽는다

침묵과 생명
떠도는 낭만의 기호들
환상과 실재
상징이 되기 위한 몸짓들

수상정보
저자 소개
  • 박형준

    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2002) 『춤』(2005), 산문집으로 『저녁의 무늬』(2003), 계간지 글로 137호 평론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 그리고 기억』(2015)이 있다. 제15회 동서문학상, 제10회 현대시학작품상을 받았다. […]

0 reviews
리뷰쓰기